"저기요, 혹시 실수인가요?"
버스 정류장, 오후 네 시 반. 하늘은 검은 비구름이 살을 파고들 듯 내려앉았다. 그녀는 투명 우산을 든 채 왼쪽 귀걸이를 습관처럼 만지작였다. 은색 고리가 가늘게 진동했다. 강준혁은 그 진동이 자신의 심장맥을 톡톡 두드린다고 착각했으니까, 발걸음을 뗐다.
한 걸음만 더 가면 그녀는 나를 볼 거야.
그는 평범한 남자였다. 스물아홉, 회사원, 지난주까지 연애 한 번 못 해봤다. 그러나 이 순간만큼은 세상의 주인공이 되어 있었다. 그녀의 뒷목에 닿은 차가운 공기마저 자신의 연기처럼 느껴질 만큼.
"저기요."
그녀가 돌아보지 않았다.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여 귀걸이를 다시 만졌다. 준혁은 그 손끝이 자신의 목을 만지는 것처럼 숨을 멈췄다.
"실수인가요?"
지금도 그녀는 회사 앞 정류장에서 기억한다. 갑자기 다가와 젖은 우산을 치켜들며 물었던 남자. 눈빛이 이상했다. 오만과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그 오만이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왜 낯선 냄새를 쫓는가
그녀는 이미 나의 것이라고 생각했나 봐.
준혁의 심장은 그녀가 버스에 오르는 순간 탈진했다. 그녀는 한 번도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이미 다음날 점심시간, 같은 카페에서 마주칠 장면을 머릿속으로 연출했다. 그녀가 앞자리에 앉으면 "우연히" 같은 테이블을 차지하고, "우산 돌려드릴게요"라고 말하는 장면.
그는 사랑에 빠진 게 아니었다. 포획에 빠진 것이다. 낯선 여자의 뒷모습에서 시작된 착각 — 그녀는 나를 기다리고 있다, 단지 아직 깨닫지 못했을 뿐 — 이 지독한 오만을 낳는다.
심리학자 로이 바움파인더는 이를 '타겟 환상(Target Fantasy)'이라 부른다. 낯선 이성에게서 ‘내가 만들어 낸 스토리’만을 보는 현상. 그 스토리는 항상 같은 패턴을 따른다.
- 그녀는 특별하다 (단지 낯선 이유로)
- 그녀는 외로워 보인다 (단지 혼자 서 있어서)
- 나만이 그 외로움을 해결할 수 있다 (단지 내가 다가갔기 때문에)
첫 번째 시나리오: 지하철 2호선
"죄송하지만, 책 제목이 뭔가요?"
박서연이 고개를 들었다. 맞은편 좌석에 앉은 남자가 미소 지으며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녀가 읽던 책 표지를.
‘그는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왜 이렇게 당당할까.’
"아, 이 책요?" 서연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남자의 눈빛이 너무 뜨거웠다. "그냥, 소설이에요."
"혹시 전자책으로도 나왔나요? 전 냄새가 좀..."
냄새? 서연의 눈썹이 찌그러졌다.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말했다. "아니, 책 냄새 말고요. 지하철 냄새... 뭐랄까, 달콤한 금속 냄새가 나서."
그 순간 서연은 깨달았다. 이 남자는 자신을 보고 있는 게 아니라, 자신이 만든 ‘서연’이라는 캐릭터를 보고 있다. 지하철에서 눈 맞은 여자, 적당히 예쁘고, 적당히 외롭고, 적당히 책을 읽는 여자.
남자는 계속 말했다. "저도 책 좋아하는데, 요즘 사람들은 다들 휴대폰만 보잖아요."
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녀의 눈은 남자의 속눈썹에 붙은 흰각질을 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시선을 느끼지 못했다. 그는 지금 자신의 ‘이야기’ 속에서 서연이 그를 반기는 장면을 상상하고 있었다.
두 번째 시나리오: 편의점 삼각김밥
"메로나랑 칵테일 냄새가 난다니까요?"
이수진이 김밥을 집어 든 채 고개를 돌렸다. 계산대 옆에서 맥주를 고르던 남자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그냥... 그게, 저도 그 조합 좋아해서요."
남자는 두 손으로 맥주 캔을 꼭 쥐었다. 수진은 그의 손끝이 흔들리는 걸 봤다. 오만과 불안의 경계. 그는 이미 수진과 함께 밤바다를 걷는 장면을 상상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수진이 그의 팔짱을 끼고 웃는 장면.
"저도 여름이면 항상 그거 먹어요."
수진이 대답했다. 그녀는 그냥 배가 고파서 메로나도, 김밥도 샀을 뿐이다. 하지만 남자는 그 상황을 ‘운명’이라고 받아들였다. 같은 편의점, 같은 시간, 같은 간식. 이 모든 게 우연이라고? 불가능하다.
그는 영수증을 받으며 말했다. "혹시... 같이 먹을래요?"
수진이 잠시 뜸을 들였다. 그 순간 남자의 눈빛이 변했다. 거절당하면 어쩌지. 그의 오만이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우리가 사랑한다고 착각하는 순간
그는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나를 통해 자신을 사랑하는 거야.
심리학자 하비어 헨드릭스는 말한다. 낯선 여자에게 다가가는 남자들 대부분이 사실은 ‘자신이 연기하는 남자’에게 반한다고. 그는 멋진 남자, 당당한 남자, 여자들의 마음을 훔치는 남자로 변신한다. 그녀는 단지 무대도구일 뿐.
이 오만은 서로를 ‘이해’할수록 더 깊어진다. 그녀가 말할수록 남자는 자신의 시나리오를 더 완성한다. 그녀가 좋아하는 영화가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와 같다고 느끼는 순간, 남자는 확신한다. 우린 운명이야.
하지만 그건 착각이다. 그녀는 단지 그 영화를 좋아할 뿐, 그 영화를 통해 남자를 좋아하는 게 아니다.
마지막 질문
오늘 밤, 당신이 지하철에서 마주친 그 낯선 여자. 당신이 그녀에게 다가가고 싶은 진짜 이유는 뭘까. 그녀를 알고 싶어서인가, 아니면 당신이 만들어낸 ‘그녀’라는 인형을 움직이고 싶어서인가.
또는… 혹시 당신도 누군가의 인형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