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싱크대의 물방울이 내 허벅지를 타고 흘렀다. 봄 햇살이 유리창을 타고 내려와 도자기처럼 하얀 피부를 간질인다. 그가 보낸 메시지 한 줄이 눈동자 안에 아른거린다.
‘벨 누르면 바로 올라갈게.’
그의 차가 우리 집 앞에 멈췄을 때
남편은 거실 소파에 깊이 몸을 묻은 채 뉴스 채널을 보고 있다. ‘서울의료원 외과팀, 로봇수술 1,000례 달성’ 자막이 스쳐 지나간다. 그는 하루 종일 사람의 가슴을 열고 닫는 일을 하지만, 내 가슴은 이미 오래전부터 닫힌 채였다.
부엌 싱크대에 서서 나는 물 한 잔을 붓는다. 손목 위 맥박이 미친 듯이 뛴다. 지금 그를 들여보내면 어떨까. 남편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을 테지. 뒤늦게 우리를 목격하고도 말없이 TV만 바라볼 테지. 그런 생각이 온몸을 타고 흐른다. 숟가락 하나를 꺼내 물에 담갔다 꺼냈다. 차가운 금속이 손가락 끝을 핥는다. 이건 미친 짐작이야. 싱크대를 붙잡고 숨을 골랐다. 그러나 심장은 이미 제멋대로였다.
내가 수치를 닙는 방식
왜 남편 앞에서 준영과의 접촉을 상상하는 순간, 가슴 깊은 곳이 화끈 달아오르는가. 왜 그 눈빛 속에서 나를 다시 찾고 싶은가. 결혼 7년 차, 우리는 서로의 일상이 되어버렸다. 남편은 내가 어제 무슨 색 립스틱을 바르며 출근했는지도 기억 못 한다. 나 역시 그가 서울의료원에서 누구와 점심을 먹었는지 묻지 않는다.
준영은 다르다. 그는 내가 새치 하나 염색한 것도 눈치챈다. 블라우스 단추 하나 풀렸을 때도 “오늘 좀 답답해 보여”라고 속삭인다. 그 빈틈을 파고드는 눈빛. 남편에게서는 이미 사라진, 나라는 존재를 발견하는 시선. 그래서일까. 남편이 그 시선을 다시 돌렸으면 한다. 그가 우리를 목격했을 때만큼은, 나를 다시 보았으면 한다. 비참하리만큼 간절한 욕망이다.
유리의 거실
지난주 금요일, 서울 강남의 한 고급 아파트. 38세 정유진 씨는 남편이 울산병원 출장 간 틈을 타 준영을 집으로 불렀다. 그는 34세, 광고 회사 아트디렉터. 키 183cm에 곱슬머리가 앞머리에 살짝 내려앉았다. 티셔츠 소매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팔뚝이 굵다.
그들은 거실 유리창 앞에서 섰다. 아래로는 한강이 보였다. 준영이 유진의 뒤에서 다가와 손등을 슬며시 어루만졌다. “여기가… 너희 침실 바로 위층이구나.” 유진은 혀끝이 마르는 걸 느꼈다. 남편이 지금 여기 있다면. 그 상상이 등줄기를 타고 전류처럼 흘렀다. 화려한 조명 아래, 두 사람이 투명한 유리 너머로 노출되는 장면. 남편의 차가운 눈빛이 우리를 관음하는 순간. 그 눈빛 속에서 나는 다시 빛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남편의 시선을 되돌리는 방법
준영은 조용히 유진의 뒤에서 숨을 내쉬었다. “여기서… 너만의 향기가 난다.” 그의 숨결이 귓등을 간질였다. 유진은 잠시 눈을 감았다. 차가운 싱크대, 남편의 뉴스 채널, 준영의 따뜻한 숨결. 세 갈래 감각이 뒤엉켜 몸을 떨게 했다. 준영은 유진의 어깨를 살며시 돌렸다. 그 순간, 유진은 남편이 서 있을 법한 거실 한쪽을 힐끗 바라봤다. 텅 빈 소파. 그 허공이 오히려 더 뜨거운 상상을 부른다.
나를 다시 보는 순간
준영의 손이 유진의 머리카락을 살폈다. “이 색… 마음에 들어.” 유진은 눈을 감았다. 여기서 멈추면 안 되는데. 그러나 준영의 손끝이 후두를 지나 목덜미를 어루만질수록, 남편의 시선이 다시 돌아올 것만 같은 착각이 강해졌다. 유진은 준영의 손을 잡았다. “여기서… 더는 안 돼.” 준영은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두 사람이 서 있는 유리창 앞에서, 한강은 계속 흐르고 있었다. 그 흐름 속에서 유진은 자신을 다시 찾는 남편의 시선을 떠올렸다. 그 시선이 다시 나를 비추는 순간, 나는 완전해질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