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심리연구소 사랑과 연애의 심리학

그를 위해 침대 시트를 갈아치우는 순간, 나는 이미 배신자였다

민우의 침대에서 지훈의 숨결을 머금는 순간, 나는 이미 두 남자 사이를 오가는 배신자가 되어 있었다. 당신도 냄새 위에 새겨진 이름을 지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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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위해 침대 시트를 갈아치우는 순간, 나는 이미 배신자였다

“여기서 냄새나는 거, 너야?”

현관 벨이 울린 시간은 새벽 1시 47분. 반바지 차림으로 문을 열자, 지훈이 서 있었다. 손엔 편의점 봉투, 안에는 맥주 두 캔과 멘소래닌. 그가 피곤한 얼굴로 웃으며 내민 봉투 끝에 새어 나온 서늘한 캔 차가움이 내 볼을 스쳤다. 그 찰나, 민우가 자고 있는 침실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괜찮아. 잘 게.

지훈은 술을 마시며 한 모금, 두 모금, 서너 모금. 민우와 나의 침대에서 쓰던 시트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그 냄새 위로 지훈의 목선이 보였다. 침을 삼키는 소리가, 내 목 안쪽에선 너무 크게 울렸다.


냄새 위에 떠오르는 너

사실은 알고 있었다. 민우와 지훈은 절친한 사이였다. 대학 동아리 선후배 사이, 서로를 ‘형’ ‘동생’이라 부르며 한 달에 두세 번은 만나 술 한 잔 하고 흩어졌다. 그런데도, 나는 민우의 뒤에서 지훈의 손을 훔쳐보고 있었다. 민우가 화장실에 가면, 나는 지훈의 남은 캔을 만지작거리며 숨결이 묻은 입 부분을 어루만졌다. 지훈은 알고 있었다. 나도 알고 있었다. 그는 알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나는 정말 지훈을 원하는 게 아니라, 민우의 손끝에서 벗어나고 싶은 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지훈의 턱선만 보면 여전히 가슴이 울렁였다.


시트 위의 자국, 우리가 지운 이름

지난 겨울, 민우는 회사 야근으로 밤새 나가 있었다. 집엔 나 혼자, 그리고 지훈이 와 있었다. 민우는 "배달 못 시켜서"라며 지훈에게 부탁했다. 우리 집에 놓인 민우의 넥타이 냄새가 싫어서, 나는 지훈의 잠깐 온 김에 맥주나 하자고 했다. 맥주 한 캔 반 정도 마신 뒤, 지훈이 물었다.

나: 여기서 냄새나는 거, 너야?
지훈: 아니, 너 아니야?
나: ……

우리는 동시에 말을 멈췄다. 그 찰나, 지훈의 손이 내 손등 위로 왔다. 손가락 하나, 두 개, 마지막 손바닥까지. 그리고는 잠잠해졌다. 한참 뒤, 지훈이 중얼거렸다.

지훈: 민우 형은 오늘 새벽에 들어올 거예요.
나: ……
지훈: 우리, 시트라도 갈까?

시트를 갈아치우는 동안, 나는 민우와 지훈의 이름을 입안에 물고 있었다. 민우, 지훈, 민우, 지훈. 혀끝에 차례로 올라가는 이름들이 입안을 타고 흘러내렸다. 새 시트 위에선, 민우의 냄새가 아닌 지훈의 숨결이 먼저 남았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 아무 일도 없다고, 우리는 서로를 속였다.


그녀의 배드타임, 나의 배드타임

희서는 32세, UX 디자이너다. 6년 차 연인 ‘도진’과 함께 살던 아파트가 있었다. 어느 날, 도진의 친구 ‘재현’이 집들이에 왔다. 그날 이후, 희서는 재현에게서 도진의 부족한 것들을 발견했다. 재현은 문 앞에서 신발을 벗을 때마다 깔창을 씻어왔다. 도진은 깔창을 씻지 않았다. 재현은 희서의 요리를 ‘최고’라고 했다. 도진은 “맛있다”로 끝냈다. 그 사소한 차이들이, 희서를 미치게 만들었다.

어느 날 밤, 도진이 출장을 갔다. 재현이 잠깐 와서 식탁의 고장난 서랍을 고쳐주겠다고 했다. 십오 분 만에 고쳐지는 서랍이었지만, 희서는 그 사이에 재현의 목뒤를 보았다. 땀 한 방울이, 재현의 뒷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희서는 그 땀방울을 혀로 받아먹고 싶었다.

희서: 재현 씨, 술 한 잔 하실래요?
재현: 아, 도진이 안 오잖아요. 괜찮을까요?
희서: 당연히 괜찮죠.

두 잔, 세 잔. 네 잔째에서 희서가 물었다.

희서: 도진이랑 나랑, 누가 더… 누가 더 좋아요?

재현은 대답 대신 희서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희서는 재현의 손등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 희서, 희서, 희서. 그 순간, 희서는 알았다. 자신이 원하는 건 재현이 아니라, 도진이 아닌 *‘도진이 아닌 무언가’*였다.


왜 우리는 더 뜨거운 것을 선택하는가

심리학자 에스테르 페렐은 말했다. “사랑은 낯선 사람과의 친밀감이 아니라, 익숙한 사람과의 낯섦”이라고. 민우는 나에게 익숙하고, 지훈은 낯설다. 하지만 민우의 익숙함이 지겨워지면, 지훈의 낯섦은 더 뜨거운 불씨가 된다. 우리는 더 뜨거운 것을 원한다. 그건 사실, 우리가 현재의 관계를 지키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현재의 나를 지키고 싶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더 뜨거운 것은, 나를 더 뜨겁게 만든다.

그 뜨거움으로 나는 민우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지훈이라는 불길 속에서, 새로운 나를 태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


당신은 어느 시트 위에서 이름을 지울 수 있을까

그날 밤, 지훈은 다시 우리 집에 왔다. 민우는 회식으로 늦었다. 문을 열자마자, 지훈은 말했다.

지훈: 민우 형은 오늘도 안 오겠죠.
나: ……
지훈: 그럼, 우리 또 시트 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이번엔 시트를 갈아치우지 않았다. 그대로 두었다. 민우와 나의 냄새 위에 지훈의 숨결이 남았다. 그 냄새를 맡으며, 나는 물었다.

당신은 과연, 지훈이 아닌 민우를 위해 이 시트를 다시 갈아치울 수 있을까. 아니면, 이젠 민우의 냄새마저 지워버릴 수 있을까.

문 앞에 서 있는 당신에게, 지금 이 순간. 당신의 손에 든 건 지훈의 맥주 캔이고, 민우의 침대는 텅 비어 있다. 시트 위의 자국, 당신은 과연 누구의 이름으로 지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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