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엄지가 내 뺨을 어루만질 때, 눈동자는 멀찍이 떨어진 커튼을 향했다. 이불 끝에 낀 먼지 하나를 바라보는 듯한 시선. 그 순간 나는 알았다. 그의 살결은 내게 닿아 있었지만, 온기의 정원은 다른 곳에 있다는 걸.
- 너무 일찍 왔나? 그가 물었다. 말은 나에게 건넸지만, 실은 저 멀리 떠나간 누군가에게 던지는 끝맺음이었다.
뜨거운 차가움
그녀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그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나의 몸은 그의 손을 더욱 탐욕스럽게 삼켰다. 이상했다. 초점이 나에게 맞지 않는 눈빛이 더욱 선명해질수록, 나는 그의 피부를 더 깊이 파고들었다. 마치 말없이 떠나간 전화번호가 남긴 쉼표를 뒤집어쓰듯.
사실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연인의 몸 위에서 남는 여백이 어디인지. 그 여백을 메우려고 발버둥치는 순간, 우리는 이미 낯선 그림자와 섹스를 하고 있는 셈이다.
이름 없는 향수
지난 겨울, 은진은 흰 눈 위에서 남자를 만났다. 첫눈처럼 조용히 다가온 그는, "여기서 널 처음 봤을 때부터였어" 라고 말했다. 은진은 속았다. 사실 그는 3일 전 인천공국의 도착장에서 예린과 입맞춤을 나누고 왔던 것이다. 예린은 뉴욕으로 떠났고, 그는 예린의 향기를 씻어내기 위해 은진의 품을 택했다.
은진이 눈을 감자, 남자의 손끝에 서린 카멜론 향이 선명했다. 그 향이 은진의 가슴을 파고들 때마다, 남자는 눈을 감고 있었다. 은진은 알고 있었다. 그 눈꺼풀 뒤에 어떤 얼굴이 서려 있는지. 그래서 은진은 더 격렬하게 몸을 움직였다. 나를 봐, 나를 봐줘. 그 외침은 이내 네가 아니면 안 돼 로 변질됐다.
눈발이 치밀던 밤, 그들은 서로를 덮쳤다. 하지만 은진은 느꼈다. 남자가 절정에 이를 때, 흔들린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온 이름이 자신이 아니라는 걸.
끝나지 않은 악보
경민은 아내 유리의 허리를 감싸고 있었다. 스마트폰 화면이 꺼지자마자, 그는 유리의 속눈썹에 입을 맞췄다. 유리는 느꼈다. 그 입맞춤이 누구를 향한 건지.
회사 동기 혜진과의 일탈은 한 달 전이었다. 단 한 번의 키스였지만, 그 키스는 경민의 혀끝에 아직도 붉은 색종이처럼 붙어 있었다. 유리는 모른 척했다. 대신 유리는 경민의 손을 자신의 가슴에 가져다 댔다. 그 손길이 혜진의 가슴을 연주하던 그 악보를 그대로 반복해주길 바라며.
내가 아닌 그녀의 리듬을 따라줘. 그래도 좋아.
그날 밤, 유리는 경민의 뒤에서 눈을 감고 혜진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래, 유리는 경민의 불륜을 용서한 게 아니었다. 유리는 그 불륜을 직접 체험하고 싶었던 것이다. 경민이 혜진에게 쓴 그 서곡을, 유리의 피부 위에서도 듣고 싶었다.
우리가 원하는 건 결국 흔적
심리학자들은 말한다. 사람은 상대의 과거를 소유하고 싶어 한다고. 하지만 정확히는 과거가 남긴 흔적을 소유하고 싶어 한다고. 그 흔적은 때로는 입맞춤의 온도, 때로는 손가락 끝의 촉감, 때로는 이름 없는 향기로 남는다.
그래서 우리는 연인의 몸 위에서 다른 이의 이름을 흘리는 순간을, 오히려 성스러운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그 순간만큼은 우리가 상대의 모든 시간을 소유하는 듯한 착각이 들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시간 속 다른 사람마저.
당신의 피부 위에 누가 있었나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한 번쯤 느껴봤을 것이다. 연인의 손길 속에 남아 있는 누군가의 발자국. 당신은 그 발자국 위에 당신의 이름을 새기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당신은 또 다른 누군가의 피부 위에, 지금 이 순간 당신이 아닌 누군가의 향기를 새기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당신의 몸 위에 지금 머무르는 입술은 과연 누구의 이름을 속삭이고 있는가.
그리고 당신은, 그 이름이 자신이 아니라는 걸 아는 순간에도, 왜 여전히 그 입술을 떼지 못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