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행 마지막 전철이 떠났다는 걸 확인한 뒤에야 나는 그의 이름을 처음 말했다."
나는 그가 아직 오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순간
스튜디오 옆 편의점, 1시 47분. 도시락 하나를 두고 ‘서진’이라는 이름을 세 번 흔들었다. 손잡이 플라스틱 위로 숨결이 차가워졌다. 그날은 회사 동아리 회식이 끝나고 택시비 아끼려고 늦은 전철을 기다렸다가, 갑자기 ‘혹시 거기 있니?’라는 문자를 지웠다. 문자를 지운 순간 화면이 꺼졌고, 검은 모래처럼 그의 이름이 입 안으로 쏟아졌다. 서진아. 입술 뒤에서 맴돌다가 삼켰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내 방 안에 아직 없는 사람에게 초대장을 내미는 기분이었다.
어두운 심리가 숨 쉬는 이유
사람은 연애를 시작하기도 전에 상대를 강간한다. 생각 속에서 먼저 벗기고, 키스하고, 눈물까지 훔친다. 그러면서 상대는 아무것도 모른 채 내 안에서 계속해서 ‘범해진다’.
이건 단순한 상상이 아니다. 연애 전야의 밤은 신도시처럼 불법 증축이 일어나는 곳이다. 한 번 든 이름은 바로 옆방에 가상의 침대를 차린다. 그리고는 거기서 계속 자라난다. ‘혹시 이제 나한테도 조금?’ ‘아니면 아직도 남자 친구 때문에 힘들어?’ 질문은 한숨 하나만큼 커졌다가, 벽을 뚫고 옆방으로 스며든다.
그녀의 집에는 아직 그의 발자국이 없었다 — 하지만
미진, 29세, 마케터
금요일 새벽, 미진은 핸드폰 알람을 두 개나 맞춰놓았다. 아침 7시 30분에 일어나면 ‘서진’이랑 점심 약속까지 완전히 상상 가능하니까. 그는 회사 건너편 카페 테라스에서 늘 자리를 잡는다. 미진은 그 자리에 앉아 있는 내일의 자신을 먼저 만났다. 손에는 아메리카노 두 잔, 한 잔은 연하게, 한 잔은 진하게. 서진은 미진이 진하게 마신다는 걸 아직 모르지만, 미진은 이미 아는 척했다.
그날도 미진은 냉장고를 열어놓고 40분 동안 서진의 목소리를 들었다. 아직 들은 적 없는 목소리였지만, 어떤 말투일지 너무 정확해서 두려웠다. 벽시계 초침이 12시를 가르켰을 때, 미진은 문득 깨달았다. 나는 그를 사귀는 게 아니라, 그를 지켜보는 역할을 만들어 버렸구나.
환승역에서 만난 음지의 계약
도현, 31세, 게임사 기획
도현은 2호선에서 9호선으로 환승하는 3분 27초를 끝까지 활용했다. 플랫폼 위로 걷는 동안 ‘지안’의 손등을 어떻게 만질지 시뮬레이션했다. 터치는 한 번, 딱 0.7초. 손등에서 손가락으로 살짝 내려오다 떼면, 그녀가 웃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는? 도현은 휴대폰 녹음 앱을 켰다. 자기가 상상한 지안의 웃음소리를 직접 흉내 내며 저장했다. 파일명: 230414_지안_웃음_1117.wav.
그날 밤 도현은 지안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녹음 파일을 14번 들었다. 15번째에는 볼륨을 줄였다. 이건 도배지. 생각 속에서 이미 지안과 잤고, 지안이 도현에게 속았고, 지안이 울었다. 그 모든 결과를 먼저 맛본 뒤, 도현은 처음으로 지안에게 문자를 쓰지 못했다. 이미 내가 다 먹어 버린 음식을 다시 접대할 이유가 없잖아. 그래서 그날부터 도현은 지안을 회피했다.
우리가 아직 손도 안 잡고 있는 이유
심리학자들은 이 증상을 ‘예행연애(anticipatory relationship)’라고 부른다. 뇌는 먼저 완성된 스크린샷을 만들어 놓고, 현실의 저화질을 거부한다. 그래서 손 한 번 잡는 데도 한 달이 걸린다. 아니, 손을 잡지 못한다. 이미 내 머릿속에서 그 사람은 나에게 상처 줬다가 다시 돌아왔고, 나는 그 사람의 눈물까지 닦아주며 용서했다. 그러면 현실에서 ‘처음’이 사라진다. 우리는 어제부터 사귀고 있었던 거야. 그래서 첫 키스는 이미 23번째 키스다.
너는 아직 불타지 않았다고 생각했지
이 밤을 지나면 서진, 지안, 혹은 니가 지금 떠올린 그 이름이 문자 한 줄로 나타날지도 모른다. 그러면 너는 놀라지 않을 것이다. 왜냐면 너는 이미 그가 올 때까지 문을 활짝 열어놓았거든.
너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의 이름을 불러봤다. 그래서 그가 아직 오지 않았다는 사실보다 더 슬픈 게 뭔지 아니? 네가 불렀던 그 이름은 너를 부르지 않았다는 거야.
그럼 이제 한 번만 더 불러봐. 혼잣말로, 입 속 깊이, 이층 침대에 숨겨놓은 맛있는 죄처럼. 그래도 아무 대답이 없다면, 너는 그를 상상하느라 내일도 지각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