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소금 봤어?”
세현이 냉장고 앞에 서 있다. 하얀 민소매, 허리가 드러난 잠바 차림. 아침 8시, 내 눈앞에서 누가 여보를 부르는가. 그건 내 친한 친구 지훈이 아침마다 부르는 호칭. 그녀는 이미 지훈의 여자친구다.
나는 잠옷 바구니를 움켜쥐고 있다. 세현이 소금 통을 집어 든 뒤, 흔들어 뿌리는 티스푼. 그게 내가 아끼던 유리 티스푼이라는 걸, 그녀는 모른다.
그녀는 이미 내 집 열쇠를 가지고 있었다
처음엔 하루만 머물라고 했다. 지훈이 대학 졸업 전시 해외 출장을 가면서, 세현이 잠시 숙소를 구하기 어렵다며. 나도 모르게 “그냥 여기 있어”라고 말했다. 지훈의 눈치를 보며, 마치 나는 선의의 천사인 것처럼.
근데 하루가 열흘이 됐고, 열흘이 보름이 됐다. 세현은 냉장고에 자기 이름 스티커를 붙이고, 샴푸통에도 자기 이니셜을 적었다. 심지어 내 옷장 한쪽에 자기 겨울 니트를 걸어 뒀다. 거실에 떨어진 건 내가 아닌 그녀의 머리카락이 더 많아졌다.
지훈은 전화로 “고맙다”만 연발했다. “세현이 편해졌다면서, 네가 많이 챙겨줬다면서.” 나는 괜찮다고 했지만, 괜찮지 않았다. 세현은 매일밤 2시쯤 부엌에 나와 물을 마신다. 그때마다 나는 침실 문을 열고, 그녀가 물잔을 두 손으로 감싸는 모습을 훔쳐본다. 그녀는 몰래 우유를 타 먹는다. 지훈은 우유를 싫어한다는 걸 나만 안다.
알고 있었다, 이건 무슨 게임인지
어느 날 새벽, 나는 그녀가 내 노트북을 열어 놓은 걸 봤다. 잠금 화면은 풀려 있었고, 검색창에는 “남자 친구 집에 오래 있으면 싫증날까”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그녀가 내 뒷모습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는 걸 느꼈다.
그날 밤, 나는 그녀와 마주쳤다. 복도에서, 우리 둘만의 어둠 속에서. 세현이 먼저 말했다.
“너, 나 여기 있는 거 싫어하는 거 알아.”
“…아니.”
“거짓말. 눈이 흔들려.”
그녀가 한 걸음 다가왔다. 나는 벽에 기댔다. 그녀의 손끝이 내 팔을 스쳤다.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온도. 그냥 피부.
“지훈이 몇 주 뒤에 온대. 그때까지 잘 부탁해.”
그녀가 웃었다. 내가 뭘 부탁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두 남자 사이의 공기는 독이었다
나는 지훈에게 전화했다. “언제 들어와?”라고 물었다. 지훈은 “일정이 밀려서 글쎄, 한 달은 더 있을 것 같아”라고 했다. 한 달. 세현은 그 말도 안 되는 시간을 누구의 허락도 없이 내 집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이라고 받아들였다.
그날 이후 우리는 ‘규칙’을 만들었다. 아침엔 서로 모른 척, 저녁엔 같이 밥 먹고, 새벽엔 부엌에서 마주치지 않기로. 근데 규칙은 누가 지키는지도 모르게 깨졌다. 세현이 내가 좋아하는 스프를 끓여 줬다. 나는 그걸 먹으며 “맛있다”라고 했다. 그녀가 “지훈이도 맛있다고 하더라”라고 말했다. 그 순간, 나는 지훈을 질투했다.
욕망은 냉장고 문을 열 때 시작된다
심리학자들은 ‘타인의 영역 침범’이 단순한 친절이 아니라 ‘관계 권력의 경계 탐색’이라고 말한다. 누구의 집이고, 누구의 침실이고, 누구의 샴푸냐는 질문은 사실 ‘누가 더 절박한가’를 묻는 것이다.
세현이 내 집에 머무는 이유는 단순히 지훈이 부재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미 두 남자 사이의 격리된 공간을 만들어 냈다. 나는 그곳을 지킬 수밖에 없었고, 그녀는 그곳을 지배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서로를 시험하고 있었다.
스무 번째 밤, 그녀는 내 침실 문을 열었다
“잠깐만, 얘기할 게 있어.”
세현이 말했다. 나는 침대 끝에 앉았다. 그녀는 문을 쾅 닫고, 맨발로 걸어와 내 앞에 섰다.
“나 여기 계속 있고 싶어.”
“…그건 지훈이랑 얘기해야지.”
“지훈이랑 얘기하려면, 네가 먼저 내놔야 해.”
나는 눈을 치켜떴다. 그녀는 무엇을 원하는가. 나는 그녀가 지훈의 여자친구라는 걸 알고 있다. 그녀는 내가 지훈의 친구라는 걸 알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뭘 하고 있는가.
“나 여기 좋아. 너도 알잖아.”
그녀가 한 발짝 더 다가왔다. 나는 숨을 멈췄다. 그녀의 손이 내 손등 위에 올라왔다. 차가움, 그러나 떨림.
“지훈이 오면 끝나는 거야?”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녀는 미소 지으며 문을 나갔다. 하지만 문을 닫지 않았다.
경계는 누가 먼저 넘는가
이 사이코드라마는 단순한 삼각관계가 아니다. 우리는 서로의 ‘존재 방식’을 침범하고 있다. 나는 그녀가 내 집에 머무는 걸 허락했고, 그녀는 내가 그녀의 관계에 침범하는 걸 허락했다. 그건 서로가 서로를 소유하려는 변종의 집착이다.
심리학 실험 하나. 세 가지 방에 각각 남자 A, 여자 B, 남자 C를 넣는다. A와 B는 연인. C는 A의 친구. C의 집에서 B가 머문다. 시간이 지날수록 A와 C는 B를 떠나지 못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둘 다 B의 ‘경계 넘기’를 즐기고 있기 때문. 우리는 모두 피해자이자 가해자였다.
마지막 질문
그녀가 다시 물었을 때, 나는 대답할 수 있을까. “그래, 여기 계속 있자”고. 하지만 그건 지훈을 버리는 말일까, 아니면 나를 버리는 말일까. 아니면 우리 모두를 버리는 말일까.
당신이라면, 어떤 문을 닫을 수 있을까. 여자친구를 빌려준 친구의 대문일까, 아니면 자신의 침실 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