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심리연구소 사랑과 연애의 심리학

그녀의 숨소리가 끊기지 않는 이유

통화가 끊겨도 남는 단 한 마디. 그 말 때문에 나는 계속해서 다시 걸었다. 음성 너머의 금기된 욕망과 공허한 상상의 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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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넘는 거 맞는데, 어때?"

밤 열두 시 반. 네이버 웍스에서 나간 지도 한참 전이었다.

  • 너 지금 집이야?
  • 응, 혼자야.

그녀의 목소리가 다리를 타고 올라온다. 나는 이어폰을 꼽고, 아무것도 안 듣는 척한다. 냉장고 문을 열었다 닫고, 물을 한 모금 마신다.

  • 그럼… 나 지금 말해도 돼?

침대 옆 스탠드만 켜진 방. 화면엔 3분 24초, 계속 누적되는 통화 시간.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는 입술을 떼지 않은 채 숨을 몰아쉰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 나 네가 떠올라서… 아래 손 대고 있어.

고개 끄덡임이 그녀에게 동의로 들렸다. 아니다, 나는 그저 멍하니 있었다.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었는데, 그녀가 속삭인다.

  • 통화 그대로 끊지 마.

그리고 11분 47초. 아무 말도 없이 들려오는 그녀의 숨소리. 나는 손을 움직일 수 없었다. 손목에 기어오르는 심장 박동만이,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였다.


욕망은 어떻게 집으로 스며드는가

내가 원한 건 뭐였을까. 그녀의 몸? 그녀가 느끼는 쾌감? 아니면 바로 이런 순간, 내가 범죄자처럼 몰래 엿보는 프라이버시?

전화가 끊기지 않는 이유는 단순했다. 끊으면 그녀의 욕망이 끝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욕망이 끝나면, 대체 누가 나를 이 밤에 불러줄까.

통화는 끝나도, 내 귀엔 그녀의 숨소리가 계속 맴돈다. 3G 품질 나쁜 구석진 동네, 뚝뚝 끊기던 소리마저도 선명하다. 나는 녹음 버튼을 누르지 않았지만, 뇌는 자동 저장했다.


실화처럼 쓴 두 개의 거짓말

1. 유리의 2주

2월 초, 유리는 회사에서 나와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2호선, 잠실방향. 그녀는 네이버 밴드 동호회에서 알게 된 '준오'와 통화를 시작했다. 처음엔 주식 이야기였다.

  • 너는 직접 사는 편이야?
  • 아니, 난 그냥 맛만 봐.

맛만 본다는 말에 그녀는 키득거렸다. 그날 저녁, 준오는 문자 하나 보냈다.

[오늘 그 말 때문에 계속 생각났어.]

그날 이후 유리는 매일 밤 열한 시, 준오의 전화를 기다렸다. 준오는 그녀에게 말했다.

  • 너 비밀번호 뭐야?
    1. 왜?
  • 아니, 그냥. 나중에 네 집에 놀러 갈 때, 문 열고 들어가면 깜짝 놀랄까 봐.

그녀는 실제로 현관 비밀번호를 486으로 바꿨다. 하지만 준오는 결국 오지 않았다. 2주 동안, 유리는 그의 숨소리만으로 하루를 채웠다. 그리고 어느 날, 준오가 사라졌다. 아무 말 없이.

2. 민재의 목요일

민재는 홍대 앞에서 소주 한 병을 시켰다. 아는 형이 운영하는 술집, 그래서 혼자 마셔도 괜찮았다. 여기서 그는 '지아'를 만났다. 지아는 타인의 대화를 훔쳐 듣다가 웃음을 터뜨리던 여자였다.

  • 너 그렇게 훔쳐 들어도 돼?
  • 아니, 근데 너희 얘기 너무 웃겨서.

민재는 지아에게 술을 한 잔 따라줬다. 그리고 새벽 두 시, 지아는 민재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참 잠든 중이었다.

  • 미안, 깼어?
  • …응.

지아는 민재에게 말했다. 지금 자기 집이 너무 시끄러워서, 혼자 있고 싶다고. 민재는 말했다.

  • 그럼 우리 계속 통화해. 내가 잠깐 말 안 해도 끊지 마.

지아는 그 말에 울먹였다. 그리고 37분간, 민재는 지아의 숨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다. 아침 일곱 시, 민재는 깨어났다. 통화는 여전히 이어져 있었다. 지아는 말했다.

  • 나 너 때문에 꿈 꿨어.

그날 이후 민재는 매주 목요일 밤, 지아의 전화를 기다렸다. 지아는 민재에게 말했다. 너랑 있으면, 집이 생긴다고.


금기 뒤의 공허한 자리

우리는 왜 전화 너머의 욕망에 이끌리는가. 그건 말하자면, 나는 여기 있지 않아라는 망각 때문이다. 실제 몸은 없고, 목소리만 있는 자리. 그래서 가능한 일탈.

심리학자는 말한다. 음성만으로 이루어지는 친밀함은 오히려 상상력을 자극한다고. 그녀는 지금 어떤 표정일까, 어떤 옷을 입고 있을까 하는 상상의 나열. 이 상상은 실제보다 맛있다. 왜냐하면, 실제는 늘 부족하니까.

그리고 더 어두운 이유. 이 욕망은 나는 그녀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다는 무기력을 반전한다. 나는 그녀의 숨소리를 들을 뿐. 그러나 그 숨소리로도, 그녀는 나를 가장 높은 순간으로 이끌 수 있다. 이게 가능하다는 건, 현실에서 나는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가.


끊지 못하는 너의 이유

그녀가 말했다.

  • 나 잠깐만,

그리고 2초 정적. 아님, 2초 침묵. 이 순간 나는 눈을 감는다. 눈을 감으면, 그녀의 방이 보인다. 2평 남짓, 침대 끝에 놓인 노트북 불빛. 그리고 그녀가 고개를 뒤로 넘긴다. 눈을 감으면, 나는 그녀의 침대 끝에 앉아 있다.

나는 끊을 수 없었다. 그녀의 숨소리가 사라지면, 나는 다시 홀로 돌아온다. 이 방, 이 냉장고, 이 침대. 그리고 나는 다시 내 몸 안에 홀로 갇힌다.

끊고 싶었을까. 아니, 나는 끊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그녀의 숨소리를 들으며, 나를 떠올린다. 그녀가 나를 떠올릴 때,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녀가 말했다.

  • 너는 왜 안 끊어?

나는 대답했다.

  • 네가 끊지 않아서.

정말 대답하고 싶었던 건, 전화를 끊으면 내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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