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주 금요일, 7시. 우리가 처음 만났던 와인바 말이야."
휴대폰 너머 남자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온다.
나는 아직 그녀의 손 한번 제대로 잡지 못했는데.
그녀는 미래에 있고 나는 과거에 머문다
3월의 어느 늦은 밤, 서울 한남동의 편의점.
린의 손에 든 휴대폰 화면이 살짝 비쳤다.
캘린더 앱 위로 빼곡한 파란 점들.
그 점들의 대부분이 남자 이름으로 차있었다. 준호, 성민, 재훈… 내 이름은 없었다.
나는 왜 이 순간을 엿보고 있지?
마치 훔쳐보는 것처럼.
린은 내가 좋아하는 여자다.
하지만 그녀에겐 이미 '다음 사람'이 정해져 있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을 마주할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으스러진다.
아무도 내게 말해주지 않는다. "가만있어, 너는 이것보다 더 잘 될 거야"라고.
타인의 날짜표를 바라보는 음습한 기쁨
린과 나는 같은 회사 7층, 텅 빈 회의실에서 종종 마주친다.
그녀가 미팅 끝내고 들어오면, 나는 이미 누군가와의 통화를 끝낸 척 가방을 싣는다.
나 오늘 좀 늦을 듯 해
8시쯤 괜찮아?
그래, 재훈이가…
그 말이 끝나기 전에 나는 회의실을 나선다.
문이 닫히는 순간, 그래, 재훈이가 좋겠지.
속으로 되뇌며 엘리베이터를 기다린다.
재훈이 누군지, 어떤 향수를 쓰는지, 어떤 와인을 좋아하는지.
아는 것 하나 없으면서도, 나는 그를 미워한다.
내가 미워하는 건 재훈이 아니야.
그녀가 남에게 날짜를 주는 행위 자체지.
욕망의 해부
사람은 왜 이미 누군가의 것이 된 대상에게 끌릴까.
심리학자들은 이를 '침입 욕망'(intrusive desire)이라 부른다.
남의 집 정원에 피어난 꽃일수록 더 화려해 보이는 착시.
린에게도 이런 착시가 있다.
그녀가 다른 남자들과 나눈 대화, 그들이 약속한 장소들.
나는 그녀를 차지하려는 게 아니었다.
단지 그녀가 다른 이의 시간표에 적힐 때마다,
내 심장이 불타오르는 걸 느끼고 싶었던 것뿐.
손에는 잡을 수 없고, 눈에는 가득하다
지난주 목요일, 10시 47분.
린과 나는 택시를 같이 탔다.
비가 와서, 우산을 하나씩 들고 있었는데도 우리의 어깨가 부딪혔다.
너는 왜 안 만나?
어? 뭐를?
연애 말이야.
그녀가 물었다.
차창 너머로 빗방울이 흐르면서, 나는 대답할 말을 잃었다.
만나고 싶은 사람이 바로 옆에 앉아 있는데.
택시는 한남동 와인바 앞에 섰다.
초록 간판 아래 재훈이 서 있었다.
린은 내 손을 잠깐 맞잡고 뛰어내렸다.
그 짧은 0.3초의 접촉이, 나의 한 달을 갉아먹었다.
금기의 향기
린에게는 흔들리는 미소가 있다.
그 미소가 재훈에게 향할 때, 나는 그녀를 떠올릴 수 없었다.
그녀의 눈빛이 재훈을 비출 때, 나는 그녀를 더 뜨겁게 원했다.
금기란 이런 것이다.
해도 되지 않는 일, 그래서 더 간절해지는 일.
린의 휴대폰 화면을 훔쳐보는 순간마다,
나는 나 자신이 더럽혀진다는 걸 안다.
하지만 그 더러움이 마약처럼 달콤하다.
왜 우리는 이것에 끌리는가
심리학자 브루너는 말했다.
"인간은 결핍된 것보다, 이미 다른 이가 차지한 것에 더 큰 욕망을 느낀다."
린의 날짜표는 그 증거다.
그녀가 재훈과 머무를 2시간, 30분, 5분.
그 시간이 내게는 영원처럼 길다.
그리고 그 길이가 다시 나를 그녀에게 묶는다.
내가 원하는 건 린의 사랑이 아니야.
그녀가 다른 이에게 주는 그 시간의 무게지.
마지막 질문
오늘 밤, 린이 재훈과 와인바를 나선다.
그녀의 손목엔 재훈이 선물한 시계가 차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 시계를 보고도 아무 말 못 할 테니까.
당신은 어떤가.
당신이 원하는 사람이 이미 다른 이의 날짜표에 찍혀 있다면,
당신은 그녀를 포기할 수 있을까.
혹은, 그녀가 남에게 주는 시간 하나하나를,
당신의 피로 적으며 간직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