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숨이 끊긴 날
"이건 뭐예요?"
사내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서랍을 열었다. 뒤늦게 밝혀진 화면에 37세 여자의 사진이 흔들렸다. 검은 원피스 어깨끈이 살짝 내려앉은 모습. 그 한 장이 오늘로 열흘째였다.
새벽 2시 47분. 아내는 곤히 잠든다. 방문 틈새로 새어드는 복도 불빛이 사진 위에 흔들리니, 여자의 목덜미가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숨겨야만 살아지는 것들
이건 단지 사진일 뿐이라고, 누구에게도 해코지하지 않는다고 스스로를 속여도
손끝은 이미 그녀의 어깨 결을 따라 가버렸다.
사내는 그녀의 사진을 47장 가지고 있었다. 단톡방에 누군가 올린 지난해 워크숍 사진들을 하나하나 저장했다. 대부분은 함께 찍은 단체사진이지만, 그는 매번 단 한 사람만을 확대해 보관했다.
그녀는 회사의 신입이 아니다. 이미 37세, 결혼도 했고 아이도 있다. 사내와는 같은 팀이지만 말 한마럿 나눈 적이 없다. 그러나 사내는 그녀가 모르는 사이에 그녀를 아주 잘 알게 되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색은 암청색. 왼쪽 어깨에 작은 점이 있다. 웃을 때 오른쪽 뺨에만 주름이 진다. 사내는 이 사실들을 마치 연인처럼 기억하지만, 그녀는 그의 존재조차 모른다.
서랍 속 증거들
한낮의 카페, '준혁'은 노트북을 열고 있다. 화면에는 여자의 인스타그램이 떠 있다. 37세 '민서'의 계정. 그녀는 어제도 올렸다. 아들과 함께 찍은 사진. 준혁은 그 사진을 오려서 아들 부분을 지웠다. 이제 화면에는 민서만 남았다. 그것도 다른 배경으로 합성했다. 마치 둘이 함께 여행한 것처럼.
이건 그냥 상상이야.
진짜로 만난 적도 없잖아.
준혁은 스스로에게 말하지만, 노트북 속 폴더 이름은 이미 '여행'이다. 안에는 민서와의 가상 여행 사진 200장이 들어 있다. 그녀의 실제 사진을 배경에 합성한 것들. 바다 앞, 산 꼭대기, 유럽 거리. 민서는 모른다. 그녀의 얼굴이 이미 수백 번 다른 장소에 있었다는 걸.
밤마다 반복되는 지문
이화원, 34세, 회계사. 그녀는 매일 밤 똑같은 일을 한다. 옆방에 사는 37세 '지영' 언니의 신발장을 연다. 지영은 하이힐을 좋아한다. 검은색, 7cm 굽. 화원은 그 신발을 꺼내어 안창을 맡본다. 지영의 발냄새가 나는 곳.
처음에는 그냥 궁금했다. 지영이 매일 어떤 신발을 신고 다니는지. 그러나 어느 날 밤, 지영이 벗어놓은 하이힐을 보고 화원의 심장이 멎을 뻔했다. 지영의 발가락 자국이 선명했다. 검은색 가죽에 지영의 발 모양이 푹 찍혀 있었다.
그날 이후 화원은 매일 밤 지영의 신발장을 연다. 지영이 모르는 사이에 그녀의 발자국을 훔친다. 가끔은 지영이 신고 다닌 양맪도 가져온다. 빨래 바구니에서 조심스럽게. 양손에 지영의 하루를 쥐고 방으로 돌아오면, 화원은 천천히 그것을 얼굴에 갖다 댄다.
금기를 부르는 이유
왜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의 단편에 이렇게 목말라하는가. 사진 한 장, 신발 한 켤레, 목소리 한 조각. 단 한 번도 말을 나눈 적 없는 사람의, 단 한 번도 우리를 본 적 없는 사람의 일부에 이렇게 불타는 이유.
아마도 거기에는 우리가 원하는 것의 전부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민서는 준혁이 원하는 여자일 수 있다. 지영은 화원이 되고 싶은 자신일 수 있다. 사내는 37세 여자가 가진 삶 전부를 갖고 싶은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채워질 수 없는 공허다. 사진은 더 이상 확대할 수 없고, 신발은 결국 지영이 내일 다시 신을 것이며, 그녀의 웃음은 사내 곁을 지나칠 뿐이다.
서랍이 말할 수 없는 것
오늘도 사내는 사진을 꺼낸다. 민서의 37번째 사진. 이번에는 회의실에서 찍은 것. 그녀가 팔짱을 끼고 창밖을 보는 모습. 사내는 그 팔짱 사이로 자신이 끼어 있는 상상을 한다. 그러나 상상은 이미 현실보다 선명하다.
너는 내가 너를 이렇게 바라본다는 걸 알까.
아니, 알고 싶을까.
서랍 속 사진들이 늘어날수록 사내의 현실은 더 흐릿해진다. 아내의 숨소리, 아침마다 마주치는 민서의 인사, 회의실에서 건네는 커피 한 잔. 모든 것이 사진 속 민서보다 희미해졌다.
너는 누구의 사진 속에 있을까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서랍 속에 있다. 남 모르게 확대된 우리의 어깨, 남 몰래 훔쳐간 우리의 신발, 남 몰래 합성된 우리의 여행. 누군가는 우리를 이미 수백 번 사랑했고, 수백 번 떠났다. 그리고 우리는 그걸 모른다.
당신은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의 서랍 속에서 숨을 죽이고 있을지 모른다. 당신의 사진 한 장이 누군가의 밤을 불태우고, 당신의 신발 한 켤레가 누군가의 꿈을 밟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당신은 누군가의 그 서랍을 열고 싶은가. 아니면 영원히 닫힌 채 두고 싶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