훅
“좋아, 그만해.” 준혁은 이불 끝을 움켜쥔 채 내 손목을 살짝 밀어냈다. 침대 옆탁자 위에 놓인 리모컨을 집어 든 그는 이내 눈을 내리깔고 볼륨을 줄였다. 티비 속 드라마 여주인공이 눈물을 흘리는 장면. 조명이 그녀의 목덜미를 은은하게 비췄다. 준혁은 그 빛에 시선을 빼앗기듯 리모컨을 천천히, 또 천천히 어루만졌다. 나는 아직 뜨거운 그의 체온 아래 있었지만, 그의 관심은 이미 차가운 플라스틱 안으로 파고들어 있었다.
피부를 건너뛴 온기
그가 만진 건 나인가, 아니면 리모컨을 통한 드라마 속 여자인가.
그날 이후 준혁은 가끔 내 몸 아래에선 손을 떼고, 대신 침대 곁의 물건에 안간힘을 썼다. 충전기 선을 끌어당기듯 손가락 끝으로 감는가 하면, 스마트워치 받침대의 둥근 모서리를 반복해 쓰다듬었다. 나는 그 손길이 내 몸에 닿는 듯 착각했다가, 다시 허공을 맞받았다. 촉감은 있어도 온기는 없는,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물건들이었다. 그 장면은 마치 두 사람 사이에 유리벽이 끼어든 듯 서늘했다.
욕망의 해부: 나를 대신하는 무언가
내가 아닌 것에 불타는 연인. 그건 단순한 싫증이 아니라, 나를 ‘방해’하지 않는 대상에 안도하는 마음이다.
심리학자들은 이를 ‘자기희생적 거리두기’라고 부른다. 상대를 직접 만지면, 상대의 반응—숨소리, 미동, 감정—이 나에게 되돌아온다. 하지만 장난감은 굳이 반응하지 않는다. 리모컨은 준혁이 쥐는 대로 말없이 빛을 내뿜을 뿐, 울지도 웃지도 않는다.
준혁은 나의 반응을 두려워했던 것 같다. 내가 ‘더 원할 수도 있다’는 상상, 혹은 ‘이제는 그만’이라는 실망 어린 눈빛을 감당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나를 대신해 아무 말 없는 플라스틱을 택했다. 장난감은—아이러니하게도—인간보다 더 인간답지 않다.
실제 같은 이야기 1: 지수와 ‘그녀’ 대신 놓인 키보드
지수(29, UX 디자이너)는 남자친구 도진이 매일 밤 랩톱 키보드를 사각사각 두드리는 소리에 잠겼다. “네일 리무드 색이 아주 끝내주더라.” 그는 모니터 속 익명의 여캠방송 BJ에게만 눈을 떼지 못했다. 지수는 가만히 그의 뒷목을 쓰다듬었다. 도진은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지만, 동시에 키보드 상단의 화살표 키를 살살 톡톡 건드렸다. 그 키는 따뜻한 지수의 손끝보다 더 뜨거운 피드백을 주는 듯 했다. 결국 지수는 화장실로 들어가 서랍 깊은 곳에 숨겨둔 네일 클리퍼를 꺼냈다. 이건 모두 잘라버릴까. 그녀는 스스로의 손톱을 남몰래 베어 문 듯, 관계의 끝을 앞당겼다.
실제 같은 이야기 2: 하영과 ‘남편’ 대신 놓인 헬스밴드
하영(34, 중학교 교사)의 남편은 꼭 잠들기 30분 전 헬스밴드를 착용했다. “수면 퀄리티를 측정해야 해.” 그는 하영의 어깨를 툭 건드리는 대신, 밴드의 작은 디스플레이를 톡톡 두드렸다. 초록색 LED가 반짝이는 순간, 남편의 눈동자엔 이상할 만큼 뜨거운 불꽃이 일렁였다. 하영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아닌, 네 심장박동 수에나 열광하는구나. 그날 밤 그녀는 남편이 잠든 사이, 헬스밴드를 조용히 풀어 거실 샤워기 아래로 던졌다. 아침에 남편은 물 속에서 건전히 빛나는 밴드를 발견하고 “배터리 방수가 뚫렸나 보다”라며 이상하다는 듯 웃었다. 하영은 그 미소를 처음으로 소름으로 받아들였다.
왜 우리는 이것에 끌리는가
금기는 언제나 ‘대체물’을 낳는다. 우리는 상대를 만질 수 없을 때, 그 상대를 ‘덜 위협적인’ 대상으로 옮겨놓는다.
반응하지 않는 물건은, 인간을 흉내 내면서도 인간의 복잡미묘함을 흡수해 버린다. 리모컨은 드라마 속 여자를, 키보드는 BJ를, 헬스밴드는 숫자로 축소된 나를 대신한다. 우리는 그 대체물에 집착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실제 관계가 주는 책임과 실망, 부끄러움에서 우리를 해방해 주기 때문이다.
“나를 만지면 너도 흔들릴 거야.” 그 흔들림이 두려운 나머지, 연인은 차라리 ‘흔들리지 않는’ 물건을 선택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물건화한다. ‘나를 만지지 않아도 돼’라는 약삭빠른 동의. 그리고 그 순간, 우리는 서로를 가장 가까이에서도 가장 멀리 밀어낸다.
마지막 질문
오늘 밤 당신의 연인은 당신 대신 어떤 물건을 어루만질까. 그리고 당신은 그 손길이 온전히 너에게 닿길 원하는가, 아니면 그가 너를 만지지 않기를 은근히 바라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