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심리연구소 사랑과 연애의 심리학

사고 난 날, 그는 소파에 앉아 와인을 홀짝였다

피 흘리는 여자친구를 바라보며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던 남자. 그 순간, 그녀는 관계의 끝을 피 냄새처럼 맡았다. 차가운 무관심이 권력이 되는 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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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난 날, 그는 소파에 앉아 와인을 홀짝였다

차가운 거실, 뜨거운 피

밤 11시 47분. 내 무릎은 이미 붉은 호수가 되어 있었다. 유리 조각이 살을 찢고 들어가는 날카로운 통증마저도, 그의 표정보다 선명했다. 채은이 휴대폰을 내려다보며 한숨만 쉬었다.

아파? 그 말 한마디. 끝.

거실 한복판에 주저앉은 나, 피가 바닥에 뚜드러지는 소리마저 시끄럽다는 듯 TV 음량을 높였다. 그의 와인 잔엔 얼음 한 조각이 아직 남아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나는 우리 관계의 시체 위에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피는 흐르는데, 사랑은 식었다

왜 그는 움직이지 않았을까. 왜 애써 못 본 척했을까.

차가운 사람은 처음이 아니었다. 나는 누군가의 무관심을 사랑이라 착각한 적이 있다. ‘차분한 게 매력이야’ 하고 스스로 세뇌했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그가 내 일상을 묻지 않을 때도, 내 눈물에 눈길 주지 않을 때도 나는 ‘공간을 존중하는 연애’라고 포장했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면, 그의 냉담함은 권력이었다. 다친 내가 아닌, 그가 앉아 있는 소파가 거실의 중심에 있었다. 피는 내 것이었지만, 시선은 그의 것이었다. 그가 선택한 무관심은 가장 잔인한 훈육 방식이었다.


지하철 2호선, 그리고 응급실 3번 침대

민지는 32세 남자친구와 2년을 함께했다. 지난달, 그녀는 지하철 문이 닫히는 순간 가방이 끼어 넘어졌다. 다리에 깊이 팬 멍과 찢어진 바지. 전화를 걸었더니 남자친구는 “회의 중이라 나중에” 하고 끊었다. 병원에서 봉합 6바늘. 그날 저녁 그는 “끝나고 피곤해서 바로 잤어” 라며 사과 대신 그랬다.

주희는 감기약을 먹고 정신을 잃었다. 35세 남친은 911에 전화조차 하지 않고, 대신 유튜브 모닝롤 클립을 시청했다. “구토하는 거 보면 나도 토할 것 같아서” 라고 말했다. 밤새 끔찍한 복통에 몸을 구긴 주희는 그때 깨달았다. 사랑은 상처를 보듬는 게 아니라, 상처를 무시하는 걸로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왜 우리는 차가운 손을 다시 잡을까

심리학자들은 ‘무관심 중독’이라는 말로 설명한다. 어렸을 때 감정적 무시를 경험한 아이는 성인이 되어서도 따뜻한 관심이 불편하다. 차라리 차가운 눈빛이 익숙하다. 사랑이란 언제부턴가 뜨거운 위로가 아니라, 냉랭한 방치가 되었다.

몸이 아픈 건 느끼지만, 마음이 버려진 건 눈치 채지 못한다. 그래서 다치면서도 미안해지고, 피 흘리면서도 눈치를 본다. ‘내가 너무 요구한다’ 라고 속삣는다. 관계의 권력자는 아픈 상대를 보며 오히려 힘이 난다. 왜냐하면 그 순간, 자신이 선택할 수 있다는 착각을 하니까.


거실의 피가 식기 전에

다음 날 아침, 나는 바닥에 굳은 핏자국을 닦았다. 스폰지를 쥔 손이 떨렸다. 아픈 건 무릎이 아니었다. 7년을 함께했다는 자부심이, ‘우린 그래도 깊은 사이야’ 라는 말이 하루 아침에 낱알이 되어 흩어졌다.

그는 여전히 소파에 앉아 있었다. 내가 떠나라 말하자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왜 그래?” 그 세 글자가 가장 뜨거운 욕설처럼 들렸다.


"당신이 피 흘리는 걸 보고도 움직이지 않았던 사람, 지금도 곁에 있는가?"

그 질문에 머뭇거린다면 이것만은 기억하라. 사랑은 냉장고에 넣어두면 굳는다. 그렇게 굳어버린 관계를 다시 녹이는 건, 결국 내 몸이 아니라 내 인생이 녹아내리는 일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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