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심리연구소 사랑과 연애의 심리학

그는 단 한 손에 제 맘도 안고 오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머물렀다

아무것도 안고 오지 않는 연인의 빈손 앞에서 발을 떼지 못하는 여자들. 유리와 민우의 이야기를 통해 ‘기대 대신 굴욕에 홀리는’ 음습한 심리를 파헹친다.

집착빈손의 유혹자기기만관계중독

“차라리 거짓말이라도 해줬어”

“배가 고프다”고, 그가 문 앞에 섰다. 겨울 오후, 난방도 안 틀어둔 방. 그는 어깨에 눈 한 점 안 묻고 왔고,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봉투 하나, 꽃 한 송이, 심지어 편의점 도시락조차.

그냥 빈손.

나는 그래도 떠밀 듯 뒷걸음질쳐 문을 열었다. 왜 하필 오늘은 안 왔으면 좋았을까.


빈손 위로 피어오르는 함정

우리는 흔히 '무언가를 기대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정작 움직이는 건 기대가 아니라, 기대가 깨질 때 생기는 굴욕이다.

그가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았을 때, 나는 처음으로 ‘나는 과연 아무것도 아닌가’라는 물음에 직면했다. 그 물음은 숨겨놓은 자존심을 발라내고, 굴욕 위에 홀린 듯 머무는 감각을 선물했다.

‘나는 왜 여기 있는가’가 아니라 ‘나는 왜 떠나지 못하는가’가 진짜 질문이었다.

그건 마치 허기진 배를 움켜쥔 채, 냉장고를 열어도 아무것도 먹지 않고 다시 닫는 행위와 비슷했다. 굶주림을 확인하는 순간, 굶주림은 또렷해지고, 그 만족할 수 없음에 홀린다.


유리의 49번째 밤

유리는 그를 만난 지 3년 차, 둘의 기념일은 단 한 번도 챙긴 적이 없었다. 첫 번째 생일엔 “난 기념일에 절대 안 와”라고 못 박았고, 두 번째엔 전날 밤샘 근무 탓에 잤다. 올해는 아예 문자 하나 없었다.

그런데 유리는 그날도 초인종을 누르는 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배달 왔나?”

“아니, 나야.”

그는 역시나 빈손이었다. 유리는 거실 테이블 위에 두었던 초콜릿 케이크를 냉장고에 쑤셔 넣었다. 케이크는 녹아내려 초콜릿이 흘렀다. 그래도 나는 케이크를 아끼는 척했다.

밤새 그는 유리의 몸만 탐했고, 유리는 그의 눈이 초콜릿보다 달콤해지길 기도했다.

이튿날 아침, 유리는 화장대 서랍 속에서 4만원짜리 약국 반지를 발견했다. 작년 크리스마스 날, 혼자 사고 혼자 숨겼던 것. 그때 처음 깨달았다. 사랑한다는 건 선물을 주는 게 아니라, 선물로부터 도망치는 거였다.


민우의 다이어리

민우는 회사 동아리 선배다. 그는 매번 모임 끝에 민우에게 “술 먹자”라던다. 그러나 민우는 6개월째 그의 집 앞 편의점에서 만나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

편의점에서 민우는 항상 동일한 메뉴를 산다. 참치 김밥, 에너지드링크 두 캔. 그건 그녀가 아닌 선배가 먹을 간식이다.

그날도 민우는 2만 원 짜리 술을 사서 선배를 기다렸다. 선배는 40분 뒤에 나타났고, “어제 또 누구랑 먹다 왔어”라며 핸드폰을 뒤적였다.

민우는 참치 김밥 포장지를 한 입에 씹으며 물었다. “나랑 왜 만나요?”

선배는 피곤한 눈으로 웃었다. “니가 있어서 편하잖아.”

민우는 그 말 속에 담긴 무게를 좋아했다. 편하다는 건,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는 뜻 아닌가.

그녀는 그날도 빈 손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두고 온 게 있었다. 편의점 계산대 위에 놓인 그녀의 자존심.


왜 우리는 빈손에 홀린다

심리학자들은 이 현상을 ‘불확실성 중독’ 혹은 ‘회피형 집착’이라 부른다. 하지만 그 정의는 너무 말끔하다.

진짜 이유는 더 단순하다. 우리는 이미 비어 있다는 사실을 증명받기 위해 저울질한다. 빈손을 받아들이는 순간, 나는 더 이상 기대할 이유를 상실한다. 그만큼 나는 나를 잃지 않는다.

굶주림이 아니라, 굶주림을 느낄 수 있는 감각에 중독된 것이다. 상처받는 것이 아니라, 상처받을 수 있는 위치에 머무는 것이 안전하다.

집착은 사랑의 뒤틀린 버전이 아니다. 집착은 사랑의 잔해 위에서 피는 환각이다. 환각은 그 자체로 현실보다 짜릿하다.


문을 닫으면 너는 무엇이 될까

유리는 결국 그와 헤어졌다. 민우는 아직도 매주 편의점 앞에서 선배를 기다린다. 둘 다 여전히 빈손이다.

그러나 그건 동일한 빈손이 아니다. 유리는 이제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고, 민우는 아무것도 받지 못한다는 걸 증명하고 있다.

당신도 오늘 밤 누군가의 빈손을 열어준다. 아니, 열어주고 싶어 한다. 왜?

문을 닫으면 너는 무엇이 될까. 빈손만 남은 방 안에서, 너는 과연 누구와 마주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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