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80회 생신, 반찬 냄새가 가득한 식당 단체석.
유리잔에 막걸리를 따르던 지영이 문득 손에 든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둘러앉은 친척들이 떠드는 사이, 그녀는 할머니의 주름진 눈동자를 마주치며 말했다.
할머니, 사실 우리 남편 거기 13cm밖에 안 돼요.
순식간에 식탁이 얼어붙었다. 장모님 앞이었다.
입 밖으로 새어나온 수치
지영은 그 말이 튀어나온 뒤에야 깨달았다. 왜 하필 지금이었을까.
그러나 동시에 온몸에 전융이 흘렀다. 평생 한 번도 말해본 적 없는 비밀을 꺼내 놓은 순간, 복수의 맛이 혀끝에서 번졌다. 남편 태수는 빨간 얼굴로 고개를 숙었다. 하지만 지영은 할머니의 눈빛을 똑바로 마주쳤다.
내가 왜 이제야 말했을까? 어쩌면 평생을 삼켜온 건 크기가 아니라, ‘크기를 말하면 안 돼’라는 심판이었는지도 모른다.
침묵의 대가
지영은 결혼 7년 차, 시어머니와 시누이에게 끊임없이 ‘남편 자랑’을 강요당했다.
우리 태수는 키도 크고 잘생겼잖아.
요즘 애들은 다들 작대, 우리 오빠는 그래도 평균은 넘겠지?
아이 낳으면 더 클 거야, 믿어봐.
그럴 때마다 지영은 미소만 지었다.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태수가 화장실에서 초조하게 거기를 재는 모습, 인터넷 쇼핑몰에서 ‘확대’ ‘보형’ 같은 키워드를 삭제 히스토리까지 지우지 못한 채 둘러대는 모습.
같은 침대에서 눈치 보느라 몸을 웅크리는 밤. 정말 이걸 평생 말하지 못하고 살아야 하나.
80년을 산 할머니가 던진 한 마디
할머니는 잔을 내려놓고 13cm라는 숫자를 입에 양치기하듯 중얼거렸다.
그게 왜 수치냐.
모두가 놀란 눈으로 할머니를 바라봤다. 할머니는 환히 웃으며 말했다.
우리 시절엔 굶어 죽기 바빴지. 그런 거 재면 어디 감당하나. 애라도 낳고 살면 그만이야.
순간, 지영은 눈물이 핑 돌았다. 그녀가 말하려 했던 건 결국 ‘크기의 부끄러움’이 아니라, ‘왜 나만 모르는 척해야 했는가’였음을 깨달았다.
또 다른 식탁, 아들 앞에서
비슷한 시기, 40대 주부 미선은 대학생 아들 민우 앞에서 남편의 발기부전 약 봉투를 내려놓았다. 배달음식을 먹던 중이었다.
민우야, 너 아빠가 요즘 이거 먹고 있대.
민우는 떡볶이를 씹던 입을 멈췄다. 초록색 봉투 위에 ‘비아그라 50mg’라는 글씨가 또렷했다. 민우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미선은 계속 말했다.
엄마도 처음엔 불쌍했는데, 이제는 오히려 재밌어. 아빠가 약 먹고 나면 눈치 보느라 몸을 움츠러들잖아.
민우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욕실로 들어갔다. 물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미선은 아들의 등을 보며 이제 너도 알게 됐구나라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남편은 이 사실을 평생 모를 것이다.
우리가 숨기는 것, 드러내는 순간
왜 우리는 남편의 몸에 대한 사실을 ‘수치’라 부르는가. 왜 그것을 말하는 순간, 마치 반역을 저지른 듯한 쾌감과 동시에 공동체에서 추방당할 것 같은 두려움이 뒤섞일까.
어쩌면 우리가 지키려 한 건 남편의 자존심이 아니라, ‘그런 것은 말하면 안 돼’라는 가부장의 규칙이었을지도.
잔을 든 할머니의 눈빛
생일잔치가 끝나고 지영은 할머니와 단둘이 남았다. 할머니는 말했다.
나도 네 할아버지가 자꾸 뒤에서 뭐 먹는지 알아. 근데 그게 뭐가 중요하냐. 중요한 건, 네가 지금까지 얼마나 꿀꿀히 살았는지야.
할머니는 지영의 손을 잡았다. 굳은살이 박힌 손이 따뜻했다.
앞으론 더 크게 말해, 더러운 것도, 작은 것도. 그래야 속이 시원해.
너는 언제까지 입을 다물고 살 것인가
당신도 누군가 앞에서 영원히 뱉지 못할 말 하나쯤은 있다. 그걸 꺼내는 순간 벌어질 붕괴를 상상하면 입이 굳는다. 그러나 그건 정말 네가 지켜야 할 비밀인가, 누군가가 만들어준 침묵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