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회식 있어서 늦을 거야."
그가 떠나고 3분 뒤, 민주는 남편의 베갯잇에서 흰머리 한 올을 꺼냈다. 샴푸 향기가 아닌, 여자의 향수 냄새가 섞여 있었다.
19년 만에 처음으로 그만 두었다. 속지 않기로.
그녀는 매일 밤 눈을 떴다
아니, 아니야. 그는 아직도 나를 사랑해.
민주는 2년째 되풀이하는 이 말을 혼잣말로만 삼켰다. 밤마다 남편의 뒷통수를 보며 확인했다. 머리카락이 젖어 있었다. 금요일마다.
그가 늦게 들어오는 날. 엘리베이터 멈추는 소리에 맞춰 화장실 물소리가 들린다. 샴푸 냄새 풀풀 나는 걸 보며 그녀는 알았다. 누군가의 머리카락을 털어내는 중이라는 걸.
아니, 그냥 회식 자리에서 머리에 술 쏟았을 거야.
그런데 왜 항상 금요일인지 물어보지 못했을까.
19년 전, 그녀는 천사였다
"결혼하면 당신 머리도 감겨줄게."
화장품 가게 알바하던 스물다섯 민주는 수염 덥석 던진 삼십대 남자 손님에게 웃으며 말했다. 그가 매주 오는 건 샴푸 때문이 아니었다. 민주의 손끝이 그의 두피를 어루만질 때마다 눈을 감았다. 마치 고양이처럼.
결혼 1년차, 그는 정말 민주에게 머리를 감겼다. 욕조에 앉아 눈을 감은 채. 샴푸 물이 이마로 흘러내려도 괜찮았다. 민주의 손길이 두피를 어루만지는 게 좋았으니까.
그러다 언제부터였을까. 목욕하는 소리만 들리고, 민주의 손길은 사라졌다. 그리고 금요일마다 머리를 직접 감는 버릇이 생겼다.
실화처럼 들릴 이야기
사례 1: 지영, 42세
지영은 남편의 정장 옷장에서 여자용 비닐 우산을 발견했다. 검정색, 손잡이에 작은 리본이 달린 것. 남편은 비가 언제 왔냐며 대답했다. 그런데 지영은 알고 있었다. 그 우산은 봄비가 내리던 지난 3월, 남편이 들고 온 바로 그것이라는 걸.
"나도 이제 속지 않기로 했어."
지영은 그날 저녁, 남편의 휴대폰을 보지 않았다. 대신 침대 밑에서 3월 14일 백화점 영수증을 찾았다. 커플 팔찌였다. 한쪽은 이미 없었다.
사례 2: 하은, 38세
하은은 남편이 '야근' 한다고 하고 나간 날, 우연히 지하철에서 마주쳤다. 남편은 혼자가 아니었다. 검은색 마스크를 쓴 여자와 손을 잡고 있었다.
그녀는 뒤돌아섰다. 집에 가서 남편이 돌아오기까지 4시간. 그 시간 동안 하은은 거울 앞에서 스스로에게 물었다.
왜 지금까지 몰랐을까.
사실은 알고 있었다. 남편이 매주 수요일,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코트를 입고 나가는 걸. 그러나 확인하지 않기로 했던 거다. 19주년이 되던 날, 더는 그럴 수 없었다.
왜 우리는 거짓을 원하는가
"거짓이라도 좋아, 사랑한다는 말이면."
심리학자 맥나이튼은 말했다. 인간은 진실보다는 믿고 싶은 진실을 택한다고. 결혼 19년 차가 되면, 부부는 서로에 대한 '믿고 싶은 이미지'를 공유한다. 남편은 아내가 여전히 아름답다고 믿고, 아내는 남편이 충실하다고 믿는다.
그런데 이 믿음이 금이 가는 순간이 온다. 머리카락 한 올, 우산 하나, 마스크 끈 하나로. 그때 우리는 선택한다. 확인할 것인가, 아니면 믿을 것인가.
아니, 아니야.
이 말의 반복이 19년을 만들었다. 오늘날까지.
마지막 질문
19주년이 되던 날, 민주는 남편에게 말했다.
"나도 이제 솔직해질게."
그녀는 남편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아니, 머리카락이 아니라 빈 허공을. 민주는 알고 있었다. 19년 동안 남편이 머리를 감는 건, 단순히 머리를 감기 위해서가 아니라 흔적을 지우기 위해서라는 걸.
그러나 그녀도 비밀이 있다. 19년 전, 그를 만나기 전. 민주는 이미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었다. 결혼 후에도 그 사람과 연락했다. 매주 금요일마다.
우리는 서로를 속이면서 19년을 살았다.
그래서 묻는다. 당신은 무엇을 더 원하는가. 진실의 참혹함인가, 거짓의 평화인가?
아직도 금요일 밤, 당신은 누군가의 머리를 감기는 건가요? 아니면, 당신의 머리를 감기는 누군가가 있는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