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수백 만원짜리 시계를 차고 왔을 때, 우리는 이미 취해 있었다. 광화문 모처의 바, 오후 11시 47분. 한 잔 더 하자며 소주를 따라주던 내가 대뜸 물었다.
너랑 누나랑 언제부터였어?
그는 한참 머뭇거리다 입을 떼었다.
나… 아직 안 해봤어.
잔이 테이블에 닿는 소리가 컸다. ‘미친, 처녀?’ 누군가의 속마음이 술안개 뚫고 튀어나왔다. 그날 이후, 그는 우리 모임에서 사라졌다.
닫히지 않는 문
왜 40대 남자가 처녀인 사실을 말하면 모두가 웃음을 감추지 못할까. 그건 단순한 웃음이 아니다. 권력의 지도가 뒤집히는 순간이다. 남자들은 ‘성적 경험의 양’으로 서열을 매겨왔고, 그 양은 ‘진짜 남자’를 증명하는 표지였다.
그가 아직 ‘문을 열지 못했다’는 건, 그만큼 ‘권력의 밖’에 있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웃는다. 웃음 속에선 경쾌한 해제가 아니라 두려움과 동시에 희열이 스민다. ‘다행히 나는 저기 서 있지 않아.’
희생양, 민수
민수는 41세, 대기업 재무팀 과장. 연봉 7800만 원, 분당 아파트 전세 살고, 매주 토요일은 어머니 모시고 미사. 처음엔 그냥 피곤해서였다. 대학 시절, 졸업 브로젝트에 쫓겨 연애는 차일피일 미뤘다. 그러다 27세 되던 해, 동아리 선배가 소개팅 자리에 데려가 줬다.
선배가 말했지. ‘오늘은 꼭 잡아, 너 때문에 나도 오래 기다렸어.’
그 압박이 너무 컸다. 차 안에서 숨이 막혀 오다, 결국 소개팅 15분 만에 도망쳤다. 그날 이후, 친구들은 더 이상 그를 남자로 보지 않았다.
“너 없이 술자리 만들게, 혼자 잘 지내.”
그게 마지막 연락이었다. 민수는 매일 저녁 유튜브에서 ‘처녀 남성, 어떻게 극복하나요’를 검색했다. 하지만 피드는 ‘처녀=창피’라는 수천 개의 농담으로 가득했다.
또 다른 문, 형준이
형준은 39세, 신림동 원룸에 살며 웹디자인 프리랜서. 그는 스무 살 무렵, 첫사랑에게 고백했다가 ‘니가 뭐가 돼서 나를’이라는 대답을 들었다. 그 말은 귓속에 녹슬어 버렸다. 이후 그는 여자들과 ‘친구’로만 지냈다. 술집에서 곁에 앉아도 손끝 하나 스치지 않았다.
“그냥… 내가 건드리면 더러워질 것 같아서.”
그는 그렇게 말하며 항상 손가락을 깨물었다. 그 손가락엔 이마저도 잘게 쪼개진 살이 박혀 있었다. 형준은 매일 밤, 자취방 벽에 비친 자기 얼굴을 노려보며 이렇게 속삭였다.
“니가 먼저 다가오면… 그때는 될지도 몰라.”
하지만 아무도 다가오지 않았다.
왜 우리는 이 남자들을 구경하는가
금기가 된 이야기는 오히려 끌린다. 우리는 이들이 가진 ‘결핍’을 보며 안도한다. 그 결핍은 마치 거대한 무대 위 떨리는 한 남자처럼, 우리의 최소한의 나쁨을 보장한다. ‘나는 저렇게까지는 아니야.’
그러나 이런 구경심리 뒤엔 역설이 도사린다. 처녀 남성을 조롱하면서, 동시에 우리는 그들이 품은 처녀성의 순수를 은밀히 동경한다. 상대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은, 가르쳐 줄 수 있다는 희열이기도 하니까. 그래서 일부 여자들은 속으로 중얼거린다.
“한 번쯤 가르쳐주고 싶은데…”
문 너머, 진짜 두려움
처녀 남성들이 느끼는 가장 깊은 두려움은 ‘처음이니까 못한다’가 아니다. 그건 오히려 핑계다. 진짜 두려움은, 문을 열고 나면 자신의 전부가 드러난다는 점이다. 그동안 숨겨온 불안, 민망함, 아무도 모르는 허점이 한순간에 드러날지도 모른다.
그래서 민수는 매일 밤, 집에 돌아와 거울 앞에 선다. 셔츠를 벗고, 비닐팩처럼 처진 살을 움켜잡는다. 그러고선 중얼거린다.
“이 모습을 누가 보고 싶겠어.”
만약 당신이 40대에 처녀라면, 어쩌면 당신은 단순히 지금까지 ‘선택’한 것일지 모른다. 선택한 건 ‘되지 못함’이 아니라, ‘알려지지 않음’ 그 자체였다는 걸.
당신은 지금 누구를 생각하는가
이 문장을 읽는 순간, 당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사람이 있다. 그가 과연 누구인가. 아직 경험하지 못한 동료인가, 아니면 오늘 밤 거울 속에서 자신을 노려보는 누군가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