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밑만 봐. 눈 맞추지 마.”
카페 창가, 테이블 아래로 닿은 그의 운동화 끝이 나의 새뮤얼 레이스업 끝과 3cm 남짓 떨어졌다. 민준은 고개를 숙였다. 숨긴다고 생각했지만 숨길수록 눈에 띄는, 저 불쌍한 눈빛이 내 무릎 위로 올라왔다가 다시 떨어졌다.
나는 딸기 라떼를 홀짝이며 애써 무표정했다. 수저를 들어 거품을 뜨는 1초, 그 사이 민준의 눈동자가 내 손등을 훑었다. 찐 듯한 느낌. 눈이 피부에 닿는다는 건, 살아 있는 번개가 스친다는 것과 같았다.
그릇된 거리
나는 모짜르트 피아노곡을 틀어 놓았다. 음악이 흐를수록 그는 고개를 더 숙였다. 내가 일부러 치마를 한 발짝 올리며 다리를 꼬았을 때, 민준은 숟가락을 얼음 위에 살짝 얹어 두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얼음이 녹는 소리가 들리면 안 되대.
우리 사이엔 미묘한 룰이 있었다. 손끝, 실제의 온도, 육신의 접촉은 모조리 금지. 대신 시선으로, 호흡으로, 그리고 침묵으로 서로를 파고들었다. 금기는 욕망을 기름에 담근 마일드론처럼 폭발 직전으로 부풀렸다.
사연 하나: 유리벽 너머의 수진
수진은 회사 창고 유리벽 뒤편에서 일하는 품질관리팀원이었다. 그녀를 관리하는 건 3개월 간격으로 회사에 들르는 외부 감사원 지후였다. 지후는 창고 안으로 발을 들이지 않았다. 대신 유리 너머에서 수진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체크했다.
수진, 실리콘 장갑 끼고 다시.
수진, 뒤돌아서서 라벨 확인.
명령은 작은 무전기를 통해 전달됐다. 지후는 한 걸음도 유리 너머로 건너가지 않았지만, 수진의 등골은 그의 시선으로 늘 서걱였다. 어느 날, 공조 시스템 고장으로 유리벽이 약간 흐려졌다. 지후의 눈빛이 옅게 번졌다. 수진은 장갑을 벗고 유리 끝에 손바닥을 살짝 대었다. 안개 자국이 번진 순간, 지후의 무전기가 잠깐 삐 소리를 냈다. 그리고 아무 말도 없었다.
그날 퇴근길, 수진은 창고 뒤 비상계단에서 지후를 마주쳤다. 계단 아래 3칸만큼 떨어진 곳에서. 둘 중 누구도 올라오거나 내려가지 않았다. 그들의 눈동자만 서로를 핥듯 움직였다. 15초, 30초… 수진이 먼저 고개를 돌렸다. 지후는 조용히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사연 둘: 도서관 빈 좌석의 희원
희원은 대학 도서관 4층 좌석에서 박사논문을 썼다. 매주 수요일 오후 3시, 윤우는 그녀 맞은편 2열 뒤에 앉아 책을 읽었다. 단 한 번도 말을 걸지 않았다. 다만 희원이 고개를 숙이면, 그녀의 흰 목덜미가 드러났고 윤우의 시선은 그곳에 랩핑됐다.
너는 여기 있다가 거기로 옮겨 앉는구나.
너는 커피 두 모금 마시고 세 번째 페이지를 넘긴다.
윤우는 희원의 패턴을 모두 외웠다. 그녀가 몰랐던 건, 윤우가 그녀가 빠진 좌석을 다시 찾아 노트에 복사한다는 사실이었다. 사각 사각 연필 소리는 아무도 듣지 못했다. 희원이 먼저 일어나면, 윤우는 5분 뒤에 책을 덮고 그녀의 발자국을 따라 걸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칠 때, 희원이 그에게 가벼운 고개를 끄덕였다. 윤우는 조용히 미소 지으며 한 걸음 물러섰다. 문이 닫히는 순간, 희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누군가 나를 지켜봤다.
금기가 불태우는 이유
손끝만큼도 허락되지 않으면, 우리는 시선으로 더 깊숙이 파고든다.
금기는 욕망의 확대경다. 거리가 생길수록 몸은 상상으로 채워진다. 민준은 내 손등의 푸른 정맥을 얼마나 세밀하게 그릴 수 있는가. 수진은 유리 너머 지후의 숨소리를 귀로 상상하며 자신의 등골을 스스로 쓰다듬었다. 희원은 윤우의 시선을 떠올리며 눈을 감고 목덜미를 만졌다.
우리는 몸을 빼앗긴 대신 상상력을 돌려받았다.
너는 지금 누구의 시선에 놓여 있니
닫는 순간,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춘 너에게 던진다.
지금 이 순간, 네가 아무것도 건드리지 못하게 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너는 과연 그 눈빛을 떨쳐낼 수 있을까? 아니면, 네가 누군가를 그렇게 묶어두고 있는 건 아닐까?
문 손잡이를 잡았다가 놓는 손끝이 떨린다. 발걸음을 옮기다 멈춘 너의 뒷모습이, 사실 누군가의 눈동자를 가장 뜨겁게 달구는 신호는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