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심리연구소 사랑과 연애의 심리학

그녀의 손이 내민 아메리카노를 뿌리치며 내가 떨던 이유

사랑이 닿는 순간, 허벅지 안쪽이 경직되는 사람들을 위한 단 한 줄의 변명. 지하철 승강장에서 차가운 아메리카노를 받지 못한 채 뒷걸음질 치는 이야기.

사랑거리트라우마성장17금
그녀의 손이 내민 아메리카노를 뿌리치며 내가 떨던 이유

그녀의 손이 내민 아메리카노를 뿌리치며 내가 떨던 이유

지하철 2호선 종각역, 눈발이 날리던 1월 새벽 2시 17분.

"여기까지 따라와줘서 고마워."

그녀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차가운 종이컵을 내민다. 얼음이 부딪히는 소리가 클릭하고 울린다. 나는 그걸 받지 못한다. 왜냐고? 손등이 닿는 순간 내 허벅지 안쪽이 경직되었기 때문이다. 따끔거리는 열기가 사타구니를 타고 올라온다.

이건 안 돼.

발끝이 땅에 박힌다. 아메리카노는 슬슬 내 앞으로, 내 몸은 슬슬 뒤로. 30cm, 25cm, 20cm… 그녀의 체온이 느껴지는 거리. 그러나 눈앞이 흐려진다. 숨이 끊긴다.

"배고프지 않아?"

그녀의 눈빛이 갈구한다. 나는 입을 다물고 고개만 흔든다. 두려움이 목끝까지 차올라 소리가 나올 리 없다. 승강장 스피커가 멜로디를 흘린다. 문이 닫힌다. 그녀가 창 너머로 나지막이 중얼거린다.

"또 그러네."


거꾸로 걷는 습관

뒷걸음치는 건 습관이 되면 더 이상 선택이 아니다. 허리가 자동으로 숙여지고, 시선이 피해 버린다. 거기까지만. 뇌리에 새겨진 가벼운 경고음. 사랑이 다가올 때마다 이 감각이 되풀이된다. 가슴이 뜨거워지면 피부가 식고, 상대가 다가오면 발끝이 얼음장이 된다. 이윽고 상대는 나를 차가운 사람이라 부른다.

"왜 그렇게 안일까."
차가운 게 아니라 무서운 것이다. 뜨거운 것이 두려운 것이다.


사례 1. 민석, 31세, 디자이너

3개월 전, 회사 동아리에서 만난 지윤과 민석은 한 달 만에 헤어졌다. 술집 테이블 위에 초록색 소주병이 네 개 놓여 있다.

"우리, 솔직히 말해보자."

지윤이 테이블 위로 손을 내민다. 민석은 재빨리 테이블 아래로 손을 숨긴다. 손등이 닿는 순간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뛴다. 지윤의 눈이 커진다. 그 다음날, 문자 한 줄이 남는다.

"나는 네가 두려운가 봐."

민석은 말한다.

내가 왜 그랬는지 아직도 모르겠어. 그냥 온몸이 식어버렸거든. 눈앞이 깜깜해지고, 숨이 막혔고. 그 자리에 얼어붙은 기분이었어.

초등 4학년, 엄마의 애인에게 맞고 엄마는 새 남자와 떠나버렸다. 사랑한다고 하면 갑자기 사라질 수도 있어. 그날 이후, 사랑에 대한 불안은 무의식의 문턱에 새겨졌다. 지윤의 손이 다가올 때, 그 문턱이 활짝 열렸다.


사례 2. 서린, 28세, 마케터

서린은 남자친구에게 프러포즈를 당했다가 그날 밤 헬스장 락커에 숨었다. 천장에 프로젝터로 "나랑 결혼해줄래?"라는 문구가 떠 있었다. 서린은 그 자리에서 볼펜을 꽉 쥐고 있었다. 손바닥에 새겨진 펜 자국이 아직도 지워지지 않는다.

"나는 정말 결혼하고 싶었는데."
그러나 16살, 부모님은 이혼했다. 아빠는 엄마에게 상처를 입혔다. 그날 이후 서린에게 결혼은 끝장이었다. 프러포즈가 아니라, 사랑이 끝나는 순간이 두려웠다. 영원이라는 말, 그게 진짜 두려웠어.


왜 우리는 사랑 뒤로 물러날까

사랑은 불가항력이다. 다가올 때마다 우리 안의 과거가 소리치기 시작한다. 또 다치고 싶지 않아. 어린 시절의 상처, 배신의 기억, 버림받은 순간들이 피어오른다. 사랑이 다가올수록, 그 상처가 더 크게 울린다.

뒷걸음질은 자기 보호 본능이다. 내가 아닌 과거가 움직이고 있어. 우리가 뒷걸음치는 건 지금의 상대를 거부하는 게 아니라, 과거의 상처를 피하려는 것이다. 사랑 앞에서 우리는 아이가 된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처받은 아이로.


끊을 수 없는 끈

그럼 어떻게 끊을까. 답은 간단하다. 못 끊는다. 그 끈은 이미 내 안에 새겨져 있다. 끊으려는 순간, 더 단단히 움켜쥔다. 대신, 그 끈을 들여다보는 수밖에 없다. 어떤 상처가 반사적으로 움직이는지. 어떤 두려움이 발끝을 얼게 하는지. 그걸 아는 순간, 뒷걸음치는 발길이 조금 느려진다. 어쩌면 반 걸음만큼. 그게 전부다. 끊는 게 아니라, 옆구리를 붙잡는 수밖에.


오늘밤, 나는 다시 종각역에 선다. 그녀가 내민 아메리카노는 식어버렸지만, 손끝은 아직도 따끔거린다. 문이 열리면 이번엔 반 걸음만 앞으로 내밀 수 있을까. 아니면 그대로 다시 뒷걸음질을 칠까.

그래도 나는 여기 서 있다. 그리고 그걸로 오늘 밤은 조금 덜 춥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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