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린 단추 하나, 얼음장 같은 맛
사랑한다고 말한 순간, 유리 잔에 떨어진 얼음 하나처럼 모든 게 소리 없이 깨졌다.
— 고마워, 진심으로.
이준혁은 그 말을 내뱉으며 손에 들린 소주잔을 살짝 기울였다. 33도 각도. 딱 내가 마시려던 양. 그는 여전히 계산적이었다.
나는 5년 만에 처음 고백했다. 하루라도 더 늦으면 이 마음이 썩어 문드러질 것 같았다. 그래서 떨리는 손으로 잔을 놓고 미친 듯이 말했다. 내가 너를, 그러니까, 사랑해.
그러자 그가 웃었다. 고맙다는 말을 할 때도 입꼬리가 올라가는 각도는 17도, 늘상 그랬던 것처럼.
욕망의 온도차
나는 사랑을 말했고, 그는 감사를 표했다. 둘 사이엔 섭씨 37도의 인간 체온만큼이나 치명적인 괴리가 있었다.
내 욕망은 끝을 향해 달려가는 화살이었고, 그의 대답은 화살을 낚아채지도 막지도 않은 채 그저 하늘을 바라보며 ‘예쁘다’고 말한 것 같았다.
그 순간, 나는 알았다. 고백은 원래 두 사람이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는 걸. 누군가는 던지고, 누군가는 피하는 거였다.
실화라 착각할 이야기
사례 1. ‘박소진’이라는 가면
지난겨울, 필자가 술집 화장실 앞에서 우연히 들은 대화.
여자: 나 진짜 너 좋아해.
남자: ……
남자: 미안, 너무 갑자기라.
여자: 뭐가 갑자기야, 4년째 봐왔잖아.
남자: 그래서 고맙지. 진짜.
그날 이후 박소진은 그 술집에 단 한 번도 오지 않았다. 아르바이트생 말로는 여자 화장실 거울이 금이 갔다던가.
사례 2. ‘강유나’의 녹음 파일
한 남성 독자가 보내온 카카오톡 음성. 남자는 6년째 비연애 중이었다.
여자: 나 지금까지 너한테만 받았던 게 있어.
남자: 뭐?
여자: 설렘. 그런데 이제는 아파.
남자: …미안.
남자: 내가 너한테 준 게 있다면 그건 ‘미안’뿐이네.
녹음 끝에 들리는 차 도어 닫히는 소리. 그리고 잔잔한 눈물방울 떨어지는 소리. 2.3초.
우리는 왜 이 고통에 끓는가
심리학자들은 말한다. ‘사랑한다’는 말은 사실 *나를 구원해달라*는 비명에 가깝다고.
그 비명이 ‘고맙다’는 답으로 메아리칠 때, 우리는 두 번 죽는다. 한 번은 상대의 무심함에, 또 한 번은 내 욕망의 허무함에.
그러나 정작 우리를 매달리게 만드는 건 그 메아리마저도 계속 듣고 싶은 병적인 기대다.
혹시 다음엔 다르게 들릴까.
혹시 내가 더 크게 외치면 반응이 달라질까.
이건 도박이다. 네가 건 돈은 오직 네 자존심뿐.
문이 닫히는 소리
이준혁은 그날 이후 연락을 끊었다. 단톡방에서도 묵묵히 나가기 버튼을 눌렀다. 1초 만에.
나는 그를 찾아가지 않았다. 그가 준 ‘고맙다’는 말이 너무 커서, 그 안에 끼어들 틈이 없었다.
오늘도 나는 그날의 잔을 들여다본다. 얼음은 다 녹았지만, 그 자리에 고인 물은 여전히 차다. 마치 누군가의 체온을 빼앗아간 채 남겨진 0.5도의 무기력처럼.
> 그래서 묻는다.
> 당신은 아직도 그 미지근한 고맙다를 마시며 살고 있나요,
> 혹시 한 모금이라도 독으로 바꿔 뱉을 용기는 없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