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지금 내가 엄마 서랍장을 열어놓고 손끝으로 실루엣 하나하나를 더듬는 걸 아실까?”
고3, 수진은 엄마의 새하얀 브라컵을 손바닥에 쥐었다. 딱딱한 패드 안쪽, 옅은 주름진 흔적. 향기 맡는 것만으로도 엄마가 방금 아침에 이걸 차고 있었다는 게 느껴졌다. 이건 아무것도 아니야. 시작에 불과해.
0. 시작, 혹은 입안에 번지는 첫 단맛
수요일 4시 23분. 집 텅 비어 있었다. 아빠는 야근, 엄마는 동생 학원, 누나는 늦잠. 수진은 지은이와 함께 키우던 햄스터를 엄마 침대 맡 서랍에 조심스레 집어넣었다. 뽀송한 니트 위에 방뇨, 똑—떨어지는 소리 하나.
“이건 뭔데?”
엄마의 목소리에 수진의 몸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날 밤 엄마는 그 니트를 꺼내 입었다. 가슴팍에서 똑 떨어지는 똥덩어리. 엄마는 눈을 피했다. 수진은 봤다. 엄마의 눈이 수진을 낯선 야수로 보는 순간을.
1. 내가 만든 진실의 주름
거짓말은 첫 키스처럼 달콤했다.
엄마의 세계를 산산조각 낼 수 있다는 사실이. 수진은 그날 이후로 계속했다. 엄마의 화장대 서랍에서 립스틱을 꺼내 손등에 살짝 찍어본다. 엄마의 가죽 벨트로 손목을 스친다. 절대 들키지 않을 것 같던 은밀한 사랑의 지문.
“다음엔 절대 안 그래.”
수진은 엄마 앞에서 17번이나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그때마다 엄마의 눈이 흐려졌다. 믿음을 잃은 아기처럼, 엄마는 수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2. 유전되는 맛
2024년 2월, 서울 대치동 스터디카페. 창현(28)은 여자친구 유진 앞에서 담배를 피운다 숨긴다. 그는 고3 누나 수진의 침묵을 옆방에서 모두 들었다. 엄마와 누나 사이에 흐르던 음습한 전류, 그걸 기억한다.
“야, 너 오늘 회사 누구 만났어?”
유진이 묻는다. 창현은 핸드폰만 뒤집는다. 카카오톡 알림 하나. ‘오빠, 오늘도 보고 싶어.’ 발신자: ‘상무님’. 유진이 그걸 봤을까? 모르는 척하는 미소가 창현의 목뒤를 간질인다.
3. 공포의 달콤한 원심력
심리학자 박혜신은 말한다.
“거짓말은 권력게임의 초콜릿맛 독이다. 상대가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순간, 관계의 힘은 거짓말꾼에게로 기울어진다.”
수진은 엄마의 불안을 사랑으로 받아들였다. 엄마가 믿음을 잃을수록, 수진은 엄마의 사랑을 더 확신했다. 사랑이 크면 클수록, 불안의 무게도 커진다.
창현도 마찬가지. 유진의 눈치를 보며, 그는 결국 자신이 엄마를 닮아간다는 걸 깨달았다.
4. 마지막 문장, 혹은 되풀이되는 쾌감
당신도 누군가에게 “다음엔 절대 안 그래”를 말한 뒤, 그 약속을 깨고 싶은 충동을 느껴본 적 있나요?
그때 당신이 진짜 숨기고 싶었던 것은, 아마 그 상대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당신은 단지 사랑하는 사람의 불안을 지켜보는 쾌감을 원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불안은, 언제나 달콤한 열기로 되돌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