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사실 변호사 아니야"
소호에 있는 칵테일바, 화요일 밤 11시 47분.
"저기요, 혹시 패션 쪽 일 하세요?" 담배 피우러 나갔다 온 그가 물었다. 회색 투피스, 왼손 검지에 은색 반지. 그 반지가 유리잔 가장자리를 스치는 소리가 유난히 선명했다.
나는 대답 대신 웃었다. 실은 그 회사에서 3년째 스카우트 중인데.
그날 나는 평소와 달리 화려한 실크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회식 끝나고 바로 온 거라서. 그러니까 내가 입은 건 280만원짜리 발렌시아가 코트였다.
그가 건넨 명함. '임세준, M&A 전문 변호사'.
"변호사님도 이런 곳에?" 내가 웃으며 물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그 명함이 3주 전에 인쇄된 것이라는 걸.
욕망의 계산법
남자들은 왜 직업을 속일까? 아니, 우리는 왜 그 속임수에 홀린 걸까?
거짓은 언제나 단순한 거짓이 아니다. 변호사라는 직업이 주는 상징 - 돈, 지성, 권력. 그리고 그 권력을 향한 나의 시선. 그는 단순히 변호사인 척 한 게 아니라, 내가 가진 욕망의 화신이었다.
180만원짜리 시계를 풀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던 순간. 그건 단순한 시계가 아니었다. 그가 연기하는 역할의 소품이자, 내게 보내는 신호였다. 나는 네가 원하는 바로 그 남자야.
그녀들이 말한다
지나 (31, 마케팅 회사 팀장)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의대생이래요. 서울대. 인턴하면서 만난 환자들 얘기를 했는데, 너무 구체적이더라고. 어떤 할머니가 매일 아들 얘기하면서 운다는 식으로. 속는 줄 알면서도... 왜냐면 그 순간엔 진짜 의사가 된 듯한 느낌이 들었거든요. 제가 만나는 남자들이랑은 다른."
그녀는 한 모금 마시며 속삭였다.
"발각된 건 3개월 후였죠. 실은 의전원 졸업반이라면서요. 근데 이상한 거 있어요? 발각됐는데도 계속 만났어요. 왜냐면... 그가 아닌 제가 더 수치스러웠거든요. 제가 원했던 게 진짜 의사가 아니라, 의사'인 척'하는 그였다는 게."
민서 (29, 기자)
"투자자였어요. 실리콘밸리에서 3개 회사 exit했다고. 페이스북 초기 투자자 중 한 명이라며. 월세 80만원 원룸 사는 여자한테 그런 얘기는 마약이죠."
그녀가 보여준 사진. 그와 함께 찍은 인물들. 자르고 확대해보니, 그건 모두 다른 사람이었다.
"알고 보니 진짜로 투자는 했더라고요. 50만원짜리 코인에. 근데 그게 더 섬뜩했어요. 50만원으로 수백억대의 환상을 만들어낸 거니까."
금기의 스릴
거짓은 결국 진실을 드러낸다. 그들이 말하는 건 단순한 직업이 아니라, 우리가 원하는 환상이다.
당신은 정말로 변호사를 원했나? 아니면 그가 선사하는, 삶이 바뀔 수 있다는 착각을 원했나?
계산된 거짓은 계산된 욕망의 거울이다. 그가 변호사인 척할 때, 나는 패션 에디터인 척했다. 우리 모두 누군가에게 원하는 '나'가 되어가는 과정이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
지난주, 그의 진짜 직업을 알게 됐다.
우리가 처음 만난 그 바에서, 똑같은 자리에서. 그가 다른 여자에게 건네는 명함. 이번엔 '영화 프로듀서'였다.
180만원 시계는 그대로지만, 손목은 달라져 있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나를 스칠 때, 우리는 짧게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우리가 속였던 건 서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원했던 바로 그 환상이었다.
그렇다면 너는 지금 누군가에게 어떤 거짓을 준비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