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는 괜찮았는데..." 나지막이 흘러나온 말
퍼득, 풀리는 끈 소리가 방을 가르고 파스 냄새처럼 퍼졌다. 잠든 새벽 두 시, 그가 내민 콘돔 포장지는 눈부시게 반짝였다. 나는 발끈 일어나 그 손목을 잡았다.
- 그럼, 전 여자랑은 안 그랬지?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한참 말을 잊은 듯 입술이 떨렸다. 그 떨림 하나로 난 알았다. 단 한 번도 아니었다는 걸. 열한 해 동안 단 한 장의 낀 피부도 없었다는 걸.
피부와 피부 사이에 끼인 과거
남편은 아내와는 안전망을 씌우지만, 첫사랑엔 안심을 맡긴다. 고무가 아닌 진짜 살결에 자신의 살결을 맞댄다. 그 간극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일종의 성적 신뢰, 혹은 방치.
‘그녀는 내가 아픈 것도 아프지 않은 것도 아니었나 봐.’
그리고 나는 미래다. 늘 미래만이다. 미래는 아직 온전히 검증되지 않았으니, 위험하니, 보호막이 필요하다. 끈적일지도 모르는 불안감을 한 장의 라텍스로 가린다.
지혜의 기억, 엘리의 기억
지혜(34)의 이야기
"우리 신혼 때마다 봉투가 떨어지면 그가 망설임 없이 대형마트로 뛰어갔어요. 그러던 어느 날, 제가 청소하다 옛 앨범을 발견했죠. 전처와의 사진이었는데, 여행 가방 속에서 빼곡히 쌓인 콘돔 봉지는 하나도 없었어요. 저는 그걸 발견하고 이상하게도 가슴이 쿵 내려앉았어요. ‘우리는 늘 ‘안전’이었구나’ 싶어서."
지혜는 이후 남편이 전처에게 보낸 문자를 우연히 봤다.
오늘도 니가 쓰던 칫솔짝 떠올랐다.
담배 냄새 나던 편의점 앞에서.
그때처럼 아무것도 끼지 않고 널 안고 싶다.
문자는 지웠지만, 고무 냄새는 지워지지 않았다.
엘리(29)의 이야기
엘리는 남펵 몰래 산부인과 검진을 받았다. "음성" 종이를 손에 쥔 날, 남편에게 선물로 새 콘돔을 샀다. 그날 밤.
- 이게 뭐야?
- 일부러 초박형으로 샀어. 느껴지게.
그가 잠시 눈을 감았다. 말없이 그녀의 손목을 잡고 침대 옆 서랍을 열었다. 안에는 전처와 함께 찍은 적 없던 허니문 사진이 누워 있었다. 거기서도, 둘은 벌거벗은 채 해변을 달리고 있었다. 콘돔 하나 없이.
엘리는 그날 처음 깨달았다. 자신이 두 번째 아내가 아니라, 두 번째 안전장치라는 걸.
왜 우리는 차가워진 고무에 열광하는가
콘돔은 단순한 피임 도구가 아니다. 그것은 연인의 역사를 가리는 얇은 장막이다. 전처와는 맞닿았던 세포, 땀, 냄새, 감정의 잔여물을 차단하는 얼음장막.
가장 어두운 심리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너의 과거를 소독할 수 없으니, 적어도 나의 미래를 멸균한다.
남편은 전처의 몸을 온전히 받아들였다. 그리고 지금 아내에게는 절대 그럴 수 없다는 두려움을 고무로 봉인한다. 그건 배신의 상징이자, 충성의 증표다. 전처에 대한 경건함을 지키기 위해 현재의 아내를 얼음장막 안에 가두는 방식.
그리고 아내는 매번 ‘하나 더 벗겨진’ 느낌으로 남펵 몸을 받아들인다. 고무가 아닌, 믿음의 한 장이 더 얹어진 채로.
너는 몇 번째 안전망인가
오늘 밤도, 그가 조심스레 포장지를 찢을 때, 너는 문득 묻게 될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네가 느끼는 저 차가운 실크처럼 매끈한 느낌 — 그게 사랑의 온도인지, 아니면 과거를 봉인하는 밀봉테이프의 냉기인지.
그리고 아마도 대답은 없을 테니, 당신은 눈을 감고 고무를 벗겨낸 뒤, 다음 장을 꺼내 들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