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도 남편은 샤워 중이었다. 평소처럼 거실 테이블 위에 던져둔 휴대폰이 진동했다. 미리 알았다면 절대 봤을 리 없는데, 눈이 먼저 움직였다.
"5월 생일 축하해, 미소야. 늘 네가 좋아하던 카페에서."
카톡 함께 보낸 모바일 상품권 50만원. 발신자 이름은 '윤서'였다. 전 부인이다. 나는 처음 알았다. 그가 지금도 그녀의 생일을 챙긴다는 걸.
그 돈의 냄새
화장실을 나온 남편은 뭐가 그리 당황스러운지 휴대폰을 덥석 낚아챘다.
"그거… 그냥 예의상."
예의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돈의 흔적이 더 있었다. 지난해 12월 '성탄절 선물' 30만원. 3월 '아이 학원비' 120만원. 합계 500만원이 넘었다. 내가 만난 적 없는 아이, 그러니까 남편의 전처 아들에게도.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우리는 매달 적금 납입에 허덕이며 ‘절약’을 외쳤다. 내가 3년째 미루던 치과 비용도 그래서였다.
나의 결혼 생활은 한편의 뒷북 공연이었다. 음악은 이미 끝났는데 나만 몰랐던 거다.
욕망의 해부
왜 그 돈은 나한테 쓰지 않았을까. 아니, 왜 나는 그 돈을 본 적이 없을까.
미소는 결혼 전날, 남편이 ‘전처한테는 아무 의리도 없을 거야’라고 말하던 장면을 떠올렸다. 그 말이 달콤하게 들렸다. 나만을 위한 남자가 되겠다는 믿음. 하지만 믿음은 통장 잔고로 검증된다.
500만원은 단순한 금액이 아니었다. 그것은 아직도 이어지는 무언의 약속이었다. 전 부인에게 주는 돈만으로도 남편은 ‘나쁜 남편이 아님’을 증명하려 했나 보다. 나는 그 증명의 희생양이었다.
실제 같은 이야기
사례 1. 지혜, 34세, 결혼 2년 차
지혜는 남편의 베라핀 앱 결제 내역을 우연히 봤다. 매달 15일, 고정적으로 77만원씩 빠져나간다. 수취인은 ‘박지영’이었다. 전 부인이다.
남편은 변명했다. "이사하면서 자동이체 놔둔 거야. 해지 귀찮아서." 하지만 지혜는 알고 있었다. 77이라는 숫자가 전 부인의 생일 7월 7일이라는 걸.
밤마다 지혜는 남편의 잠든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이 남자가 여전히 누군가의 생일을 챙기며, 누군가의 등록금을 챙긴다는 사실이. 눈을 감은 남편의 눈꺼풀이 살짝 떨리는 것 같았다. 혹시 꿈속에서도 그녀를 부르고 있을까.
사례 2. 수진, 38세, 결혼 5년 차
수진은 결혼 5주년을 맞아 화려한 호텔 저녁식사를 준비했다. 하지만 남편은 한 시간 늦게 왔다. 변명은 뻔했다. 회식이 길어졌다고.
다음 날 수진은 남편 차 안에서 영화 티켓 2장을 발견했다. 시간은 어젯백 7시. 영화는 수진이 보고 싶다던 그 영화였다. 옆 좌석은 빈 종이 티켓이었다.
결국 알고 보니 그 표는 전 부인과 봤다. 남편은 말했다. "아들 학교 별로 안 좋아져서 그냥 같이 좀…"
수진은 5주년 기념 촛불 디너에서도 한 번도 웃지 못했다. 불꽃은 남편의 눈에 비쳤지만, 그 눈동자 속에 다른 사람의 초상이 떠 있었다.
왜 우리는 이것에 끌리는가
결혼은 ‘지금’을 사는 제도다. 그런데 왜 우리는 과거를 거래하는 남편들 곁에 서 있을까.
심리학자 에스더 페럴은 말한다. “결혼은 욕망의 단절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의 욕망이다.” 남편은 전 부인에게 돈을 주며 자신이 ‘책임지는 남성’이라는 정체성을 유지하려 한다. 동시에 현재 아내에게는 무한한 헌신을 약속한다. 양쪽의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집착. 그게 바로 500만원의 정체다.
우리는 그 돈을 보며 단순히 ‘배신’이 아니라 ‘존재의 분할’을 목격한다. 남편은 여전히 과거의 일부를 품고 있다. 그리고 그 과거는 나와의 결혼에선 영원히 맛보지 못할 맛이 있다.
내가 지불하지 못하는 것은 단순한 돈이 아니라, 남편이 과거에 쏟아부은 감정의 만원봉투다.
마지막 질문
결혼 뒤에 숨겨진 돈의 흔적은 사실 어둠이 아니라 거울일지도 모른다. 당신은 지금 이 순간에도 남편의 지갑에서, 혹은 당신의 마음 한편에서 버려두고 싶지 않은 누군가를 위해 비밀리에 돈을 모으고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