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저녁 7시, 우리 집 식사자리에 앉아 있지 않으면 넌 존재하지 않아."
준혁은 차갑게 말했다. 번개처럼 내 귀를 후려쳤다. 그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떠났다. 전화기 화면엔 ‘읽음’ 표시만 남았고, 나는 24시간의 카운트다운 속에 홀로 남았다.
지워질 시간의 끝
24시간. 1,440분. 86,400초.
숫자가 눈앞에 맴돈다. 안그러면 끝이라는 그 말의 무게는 실감된다. 존재를 지우는 시간은 늘 그렇게 현실적이다. 어젯밤까지 나를 안던 팔이, 내 머리를 쓰다듬던 손이, "사랑해"라던 입술이—모든 게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사라질 거라는 말.
나는 왜 이 말에 붙잡혔을까? 사실은 지워지는 게 두려워서가 아니라, 지워질 수 있다는 상상이 너무나 달콤해서.
두려움 뒤의 달콤한 충동
준혁은 처음부터 그런 사람이었다. 누군가를 지울 수 있는 사람. 나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가 나를 어떻게 보는지, 나를 어떤 공간에 두고 싶어하는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그는, 내가 있던 작은 서점에서 내 손에 들린 책을 빼앗아 읽더니 말했다.
"이 책, 네가 읽기엔 무거운데."
그게 시작이었다. 나는 그의 무게에 끌렸다. 누군가 나를 판단하고, 나를 옮기고, 나를 지울 수 있는 힘이. 그 힘이 나를 삼켰다. 그리고는 이제 나를 지울 수도 있다고 말하는 거다. 24시간 안에.
실화 같은 이야기, 두 편
1. 2019년 3월, 서울
민서는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남자친구는 3일 전에 늦게 온 문자 하나를 남겼다. "가족들이 너를 만나고 싶어 해. 금요일 저녁 7시, 우리 집. 안 오면 난 너를 몰라."
민서는 그날 밤 늦게까지 고민했다. 가족이라는 말은 언제나 무거웠다. 그녀는 가족이 없었다. 시골집에 아픈 엄마 하나가 있지만, 그건 그녀의 가족이 아니었다. 그녀는 금요일 저녁 7시에 우리 집이라는 말 앞에서 서 있었다. 문 앞. 그리고는 돌아섰다.
그 뒤로 그녀는 사라졌다. 남자친구는 그녀의 연락처를 지웠다. SNS는 차단됐다. 그녀는 책상 위 두고 간 노트 한 권만 남겼다. "나는 무엇인가를 지울 수 있는 시간 속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시간은 나를 지웠다."
2. 2021년 11월, 부산
동진은 결혼 3년 차, 아내 수진이 그를 갑자기 불러 세웠다. "내일 당장 우리 아빠 생신잔치에 와. 안 오면 나는 너를 남편이라고 부르지 않을 거야."
동진은 회사 회식에 있었다. 그는 술을 마시며 말했다. "아, 그래. 안 갈게."
그날 밤 그는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아내는 그의 옷가방을 싸서 보냈다. 문자 하나. "너는 이제 없어."
동진은 2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그날의 말을 되새긴다. "왜 그때 갔어야 했을까. 아니, 왜 안 갔을까." 그는 늘 혼잣말로 되물었다. "왜 나는 존재하기를 포기했을까."
우리는 왜 지워질 수도 있는 말을 듣고 싶어 하는가
사람은 누구나 한 번쯤 지워지고 싶어 한다. 존재가 너무 무거워서. 혹은 존재가 너무 가벼워서. 남자가 말하는 "지우겠다"는 말은, 사실은 우리가 원하는 말이다. 누군가가 나를 놓아주길 바라는 마음. 누군가가 나를 붙잡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말. 그 힘이 나를 지울 수도 있다는 말.
그래서 우리는 그 말에 끌린다. 사라질 수도 있다는 상상이 주는 자유. 존재를 포기할 수 있는 권리. 남자는 그걸 말한다. "내일 오지 않으면 넌 없어." 그 말은 사실은 우리에게 던지는 말이다. 너는 언제든 없어질 수 있어. 그러니까, 너는 지금 여기 있어도 괜찮아.
마지막 질문
준혁이 내일 7시를 기다릴까?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냥 창밖을 바라봤다. 시간이 흐르는 걸 느꼈다. 24시간이 지나면 나는 없을까, 아니면 아무 일도 없을까.
어느 쪽이 더 두려운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