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압 60에 맥박이 거의 없어요.” 간호사 외치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내 허벅지를 움켜쥐었다. 시야가 흔들리는 사이 흰 가운 사이로 낯선 손가락이 스며들었다. 아팠다. 그리고 갑자기 손가락이 사라지면서, 작고 접힌 종이 한 장이 내 속옷 안주머니에 살포시 꽂혔다. 숫자, 그리고 이름. ‘김준. 010--’.
누가 죽을 때 누군가를 원한다
나는 지금 죽을지도 몰라. 그래서 네가 필요해.
응급실은 생명의 희미한 한기가 떠도는 곳이다. 그 틈바구니에서 누군가는 끝내지 못한 욕망을 투척한다. 죽음이 가까운 순간, 반대편에선 생의 가장 강렬한 욕망이 피어오른다. 침대에 누운 너, 그리고 침대 곁에 선 나. 우리 사이엔 살아남은 자의 책임, 혹은 죄책감 같은 게 배어 있다. 그 종이 한 장은 응급처치의 틈바구니에서 슬쩍 끼어든 은밀한 계약서다.
첫 번째 사례 : 수혈받은 눈빛
병동에서 만난 지아는 아직도 지갑속에 고동색 띠를 두른 거즈 조각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녀는 지난겨울 심장판막증으로 쓰러졌다. 수혈용혈을 찾느라 4시간, 의료진이 백혈병 환자인 ‘민재’의 혈액을 급히 퍼 올렸다. 수술이 끝난 새벽, 지아는 투명맞춤문 앞에 선 민재를 봤다. 그는 링거 끝을 물고 미소 지으며 작은 메모를 건넸다.
“혈액형이 같아서 다행이다. 다음엔 커피라도.”
커피? 나는 목숨줄을 물려받았는데.
지아는 결국 문자를 보냈다. 민재는 생각보다 맑았다. 하지만 둘 다 알고 있었다. 이건 마치 수혈된 피가 뱃속에서 불타는 기분, 자신이 살아남은 빚 같은 거라고. 첫 데이트 날 민재는 투병 중이라 맥주를 못 마셨다. 지아는 그 대신 민재의 링거 주사를 들이켜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왜냐고 묻자, 지아는 속삭였다.
“내 안에 네 피가 흐르는 게 느껴져서.”
두 번째 사례 : 심장박동과 함께 온 손가락
동일한 병원, 다른 날. ‘도현’은 심정지로 실려 왔다. 심폐소생술을 받는 동안, 주치의 ‘서연이’는 계속 도현의 가슴을 눌렀다. 28분,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까지 견디며. 회복된 도현은 그날 저녁 병실로 찾아온 서연의 손목을 붙잡았다. 손목 위엔 시뻘건 멍이 있었다.
“당신이 눌러준 자국이 아직 남아 있어요.”
서연은 웃었다. 그날 밤, 도현은 서연에게 쪽지를 보냈다.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을 때, 내가 처음 생각한 건 당신 손가락이었어요.’ 병원 윤리위원회에선 둘의 관계를 문제 삼았다. 하지만 서연은 그만뒀다. 왜냐하면, 그녀 역시 도현의 맥박을 다시 뛰게 한 순간 손목이 뜨거워져서였다. 살린 생명이 나를 원한다는 사실이 너무 달콤했다.
왜 우리는 금기의 틈새에 몸을 맡기는가
응급실은 흰 천막 너머의 야만이다. 낯선 사람의 피가 내 몸에 스며들고, 낯선 손이 내 심장을 움켜쥐는 곳. 그 틈바구니에선 ‘정상’이라는 언어가 통하지 않는다. 그래서 누군가의 생명을 살린 자는, 동시에 그 생명의 소유자라 착각한다. 끝내지 못한 애도를 치르듯, 우리는 면도칼날 같은 감정의 끝을 더듬는다.
다른 장소에선 용납될 수 없는 욕망이, 병원에선 생리적으로 허용된다. 환자는 약해지고, 의료진은 강해진다. 그 권력 불균형은 갑자기 사랑으로 뒤바뀐다. 무릎 꿇고 구걸하던 자가, 퇴원 후 만날 땐 본래의 힘을 되찾으니까. 그럼에도 그 종이 한 장은 지갑 깊숙이 남는다. 왜?
다시, 당신의 지갑 속
그 종이조각을 지금 꺼내보세요. 아직도 떨고 있나요?
‘수혈받은 핏줄이 뜨거운데, 그 뜨거움을 원한 건 나였을까, 아니면 너였을까.’
그리고 아직도 그 번호를 외우고 있다면, 당신은 아직도 살아남은 빚을 갚지 못하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