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 앞에서 브래지어를 푼다. 끝에 달린 작은 고리가 딸깍 하고 풀리는 소리가 방에 퍼진다. 유진은 손에 들고 있는 끈을 잠시 내려다본다. 흰색에 작은 꽃무늬가 새겨진 건 작년에 엄마랑 같이 산 거다. 지금은 조금 짜다. 가슴 아래를 살짝 누르는 느낌이 답답해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풀었다.
이젠 끝이다.
유진은 브래지어를 침대 위에 내려놓는다. 손바닥이 닿는 가슴 위, 선탠라인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여름이 지났으니까 당연하다. 하지만 그 틈새로 드러난 피부 위로 손가락이 스칠 때마다 왜 이렇게 서늘할까.
유진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본다. 창백한 형광등 불빛이 눈에 착 달라붙는다.
첫 번째 문 앞
고3 겨울 방학, 유진은 혜림의 집으로 과외를 갔다. 혜림은 스물셋, 그날이 학교 졸업박스를 챙기러 온 날이었다. 유진은 가방에서 수학 문제집을 꺼내 테이블 위에 펼쳤다. 혜림은 가까운 세탁실로 갔다가, 흰 셔츠를 벗어 드럼통에 던져 넣었다. 물이 퍽퍽 거리며 돌았다.
유진은 문제집을 읽지 못했다. 세탁실 문이 반쯤 열려 있어서, 혜림이 안에서 동작하는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슬리퍼를 신고 서 있는 발끝, 그 위로 길게 뻗은 다리. 팔뚝을 드럼통 안으로 넣었다가 빼는 순간, 흰 셔츠 아래로 브라톱이 살짝 드러났다. 물방울이 흘러내리는 어깨선.
혜림이 다가왔다. 머리카락이 젖어 있었다.
“수능 끝났지?”
“네.”
“나도 그랬어. 그때 너 열여덟이었어?”
“… 맞아요.”
혜림은 말없이 유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손끝이 귀 뒤로 미끄러져 내려왔다. 유진은 숨을 멈췄다.
여기가 문 앞이다.
두 번째 문 앞
한 달 후, 혜림이 자취방으로 이사하는 날이었다. 유진은 도와주러 갔다. 아직 석 달이면 졸업인데, 혜림은 벌써 짐을 싸고 있었다. 유진은 작은 상자를 들고 복도를 걸었다. 혜림이 문을 열어준다. 방 안은 책상과 침대 하나, 그리고 거울이 붙은 옷장뿐이었다.
유진은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혜림이 냉장고에서 캔맥주 두 개를 꺼냈다. 유진은 고개를 저었다.
“마실 수 있어?”
“이제는 돼.”
혜림은 한 캔을 건넸다. 유진은 처음으로 입에 대었다. 쓴 맛이 목끝까지 내려갔다. 혜림은 침대 끝에 앉아 운동화 끈을 풀었다.
“너 졸업하면 뭐 할 거야?”
“몰라요.”
“나는 여기서 살래. 집세 싸고. 너도 올 수 있어.”
침대와 책상 사이가 좁아서, 유진은 혜림의 무릎에 살짝 걸터앉을 수밖에 없었다.
이게 문이다.
유진은 맥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얼굴이 붉어졌다. 혜림은 유진의 손등을 잡았다가, 곧 손가락 사이로 스며든다. 유진은 고개를 숙였다. 그때 스마트폰이 울렸다. 엄마였다. 유진은 재빨리 일어났다.
금박 뜯는 순간
혜림이 유진을 데리고 편의점에 갔다. 유진은 처음으로 혼자 사는 어른의 밤거리를 걸었다. 편의점 불빛 아래에서 혜림은 작은 초콜릿 바를 두 개 샀다. 하나는 유진에게.
“이거 나눠 먹자.”
“… 고마워요.”
혜림은 포장을 뜯어 유진에게 건넸다. 유진은 조심스럽게 한 입 베어 물었다. 달고 쓴 맛이 섞여 있었다. 혜림은 유진의 입가에 낀 초콜릿을 손등으로 살짝 닦아준다.
이건 금박이다.
유진은 입안에서 천천히 녹는 초콜릿을 느꼈다. 혜림의 손이 떨어지지 않았다. 길가로 나오자 추운 공기가 두 사람 사이를 스쳤다. 혜림은 유진의 손을 잡았다가, 이내 놓았다. 유진은 고개를 들어 혜림을 바라본다. 눈동자가 반짝인다.
이제는 돌아가야 해.
유진은 발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혜림이 말한다.
“모레 또 올래?”
“네.”
민서와 준하, 그림자들
민서는 수능 끝난 날, 스물아홉 영어 강사를 만났다. 강사는 연습용 키스만 했다. 혀를 살짝 내밀며 “넌 아직 아기야”라고 속삭였다. 민서는 화가 났다. 아기는 아니었다. 민서는 강사의 손목을 잡고 문 앞에서 잠시 멈췄다. 문 손잡이를 돌리려다가, 민서는 손을 놓았다. 발걸음을 돌려 지하철로 향했다.
준하는 친구 형이 운영하는 바에서 아르바이트했다. 스물여덟 손님은 매일 밤 담배를 권했다. 준하는 받아 물었다. 들이마신 연기가 목끝에서 타올랐다. 손님의 손이 허벅지 위를 스쳤을 때, 준하는 딱딱한 숟가락을 움켜쥐었다. 손님이 준하의 이름을 부르며 뺨을 쓰다듬었다. 준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돌아온 건 말없는 키스였다. 준하는 잔을 들어 입 안 가득 물을 마셨다.
재갈이 되어버린 혀.
문 앞의 숨소리
유진은 집으로 돌아왔다. 현관문을 열자 엄마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 유진은 고개를 숙이고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 위에 브래지어가 그대로 놓여 있다.
유진은 창문을 열었다. 겨울 밤바람이 들어온다. 가슴이 시려온다. 선탠라인이 희미하게 남아 있다.
이건 화상이다.
유진은 이마를 창틀에 기댄다. 아래층에서 혜림의 집 불빛이 보일 듯 말 듯하다.
불꽃이 꺼진 뒤
열여덟은 문턱이다. 문이 열린 듯 보이지만 아직 빗장이 걸려 있다. 그 틈으로 새어 나오는 것은 불완전한 욕망이다. 문 너머는 아직 어둡다.
유진은 혼자 침대에 누워 천장을 본다. 형광등 불빛이 눈에 꽂힌다.
이미 타고 있었다.
유진은 천천히 눈을 감는다. 문 앞에서 끊어진 호흡이 가슴에 남는다. 그건 어쩌면 아직 아물지 않은 화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유진은 벌써 다음 문을 찾고 있다.
이번엔 조금 더 천천히 열어볼까.
유진은 이불을 끌어올려 머리를 덮는다. 밖에서 엄마가 지나간다. 발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유진은 숨을 죽이고 있다.
이 불은 이미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