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은 아직 안 했어.”
그날도 민재는 아내가 보낸 문자를 지우고, 최소한의 거짓말을 준비했다. 회식이라고 했다. 연차를 썼다. 대리운전 기사에게도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택시가 멈춘 곳은 반지하 포차가 아니라, 은영의 원룸 현관이었다.
은영은 문 앞에서 신발을 벗으며 속삭였다.
너, 진짜 이혼한 거 맞지?
민재는 대답 대신 그녀의 뒷목을 잡았다. 입술이 닿기도 전에, 핸드폰이 진동했다. 아내였다. "야, 오늘도 늦어?" 스피커에서 새어 나온 목소리는 너무 민낯이라, 은영의 숨결이 차가워졌다.
끝내지 못한 끈
사람들은 미련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건 너무 순진한 말이다. 민재가 붙잡은 건 서류 위 도장이 아니라, 지옥의 열쇠였다. 아내와는 이혼을 미뤘고, 은영과는 연애를 시작했다. 두 여자 사이에선 "아직"이라는 한마디가 지뢰처럼 묻혀 있었다.
아직이란 말은 어떤 욕망을 숨기는가?
- 책임감도 아닌
- 미련도 아닌
- 그저 끝내고 싶지 않은 무언가
사례 1: 현관 비밀번호
2023년 10월, 서울 방배동. 세무사 지훈(41)은 아내 몰래 집을 팔았다. 매수자는 그의 동거녀 수진(29). 계약서에 서명하면서도 지훈은 말했다.
이혼은 아직이야.
수진은 현관 비밀번호를 1125로 바꿨다. 11월 25일은 처음으로 함께 잔 날. 그러나 새 주인이 된 지 이틀 만에, 아내가 찾아왔다. 우체국 택배라고 거짓말하고 비밀번호를 눌렀다. 열리지 않았다. 순간 문 앞 CCTV에 잡힌 아내의 표정은, 누군가 당신의 침대에서 잤다는 걸 알았을 때의 표정이었다.
수진은 퇴근해서 피묻은 현관매트를 보고도 묻지 않았다. 그저 침대 시트를 새로 꺼내어 깔았다. 지훈은 그날 밤, 아내에게 ‘서류 정리 좀 더 미뤄달라’는 문자를 보냈다.
사례 2: 죽은 자의 이름
부산 해운대, 2024년 2월. 영어 강사 혜원(35)은 결혼 6개월 만에 남편을 잃었다. 차 사고. 장례식 날, 남편의 오랜 친구 재우가 찾아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직 이혼 안 했네?
재우는 남편을 잃은 혜원의 손을 잡았다. 죽은 사람 앞에서도 거짓말을 하고 싶은 욕망. 혜원은 상속세를 물려받아서, 아직 미망인으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재우의 침대에서도, 여전히 ‘미망인’이었다. 눈을 감으면 남편의 상복 차림이 떠올랐다.
혜원은 재우와 함께 있을 때마다 장례식 사진을 휴지통으로 드래그했다. 휴지통이 비워지기 전까진, 그녀는 미망인이었다. 죽은 자를 용서하지 않기 위해, 죽은 자의 이름으로 욕망했다.
금기를 향한 마그넷
심리학자 칼 융은 ‘어두운 그림자’라고 했다. 하지만 그림자는 뒤로 갈수록 길어진다. 이혼을 미루는 사람들은 그림자를 집 앞 현관등으로 삼는다. 나를 뒤따르는 걸 모두 비추어 주되, 결코 더 이상 걸어가지 않는다.
왜?
- 우리는 끝내지 못한 관계에서만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다. 끝내면 선택의 책임이, 끝나지 않으면 운명의 책임이 된다.
- 금기는 욕망의 확대경이다. ‘할 수 없는’ 그 순간이 가장 강렬하게 느껴진다.
- 거짓말은 사랑보다 오래간다. 사랑이 식으면 거짓말이 남는다. 거짓말이 사라지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아직, 아직도
민재는 아침마다 은영의 머리카락을 침대에서 쓸어 담았다. 아내가 보지 못하게. “이거 뭐야?” 하고 물으면, “아까 미용실 다녀왔어”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미용실은 한 달 전에 폐업했다. 민재는 그 사실까지 아내에게 숨겼다. 사람은 사라진 가게에서도 거짓말을 한다.
당신은 누구의 아직인가?
당신도 누군가에게 “이혼은 아직”이라고 말하고 있지는 않은가. 혹은 누군가에게 “사귀는 사람 아직 없어”라고, 혹은 “그와는 헤어졌어”라고. 그 ‘아직’ 뒤에 숨은 지옥의 문은 이미 열렸다. 당신은 그 문을 닫으려는 손길이, 아니면 더 깊이 들어가고 싶은 발걸음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