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심리연구소 사랑과 연애의 심리학

평범하지 않은 배의 곡선, 그가 사라지는 이유

허리 끈을 풀자마자 솟아오른 배 곡선이 연인의 눈빛을 식혔다. 그 순간, 사라진 건 사랑이 아니라 그들이 숨기던 공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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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하지 않은 배의 곡선, 그가 사라지는 이유

“끈을 풀어줘도 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진의 손가락이 모직 스커트 단추를 풀자마자 피부가 숨을 쉬었다. 서늘한 공기가 복부를 간질였고, 음산한 헬스장 거울에 투영된 나는 예상보다 둥글게 튀어나와 있었다.

수진은 나지막이 웃었다. “너무 먹었나 봐.”

그때, 민재가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는 말없이 나의 배를 바라보다가 눈을 피했다. 눈동자가 식은 김이 서린 듯, 눈꺼풀 아래 미묘한 떨림이 스쳤다. 그날 이후, 연락은 끊겼다.


배 안의 반딧불

복부는 가장 배신적인 부위다. 평소엔 평평한 선으로 존재하다가도 한 끼만 과하면 달빛 아래 흰 물결처럼 부풀어오른다. 이 커브가 사랑을 멈추는 스위치가 될 줄 누가 알았겠나.

남들은 다리, 가슴, 엉덩이를 말하지만 막상 가 사라지는 순간은 배가 조심스레 드러날 때다. 마치 아주 오래된 비밀을 품은 태엽장치처럼, 반짝이는 지방층이 흔들릴 때마다 욕망의 온도계는 서서히 내려앉는다.


지하철 2호선, 19시 47분

윤아는 매일 저녁 종로에서 성수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 ‘그’를 만났다. 이름도 모르는 남자지만, 그는 항상 서 있을 때마다 낮게 깔린 목소리로 물었다. “오늘도 뛰었어?”

그녀는 러닝클럽에 다닌다는 거짓말을 하며 뱃살을 숨기려고 배에 팔을 꼭 댔다.

한 달쯤 지났을까. 술에 취한 그녀가 택시에 같이 타자고 했다. 차 안, 그는 가쁜 숨을 삼키며 그녀의 블라우스 단추를 풀었다. 버튼이 딸깍 딸깍 풀릴 때마다 그녀의 뱃살이 양파 껍질처럼 드러났다.

“창문 좀 내려줄래요?”

남자는 갑자기 택시 기사에게 말했다. 창문이 내려가며 차가운 공기가 들어왔고, 그는 그녀의 배를 한 번도 만지지 않았다. 다음 정류장에서 갑자기 내린 그는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윤아는 그날 밤 냉장고 속 김치찌개를 끓여먹으며, 내 몸이 누군가를 죽였다고 생각했다.


밀실에서 벌어지는 침묵의 탄생

우리는 왜 이 불완전한 커브에 이끌리면서도 그것이 드러나는 순간을 두려워할까.

심리학자 안드레아 스피넬리는 ‘지방 불안’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배의 부풀어 오름은 동시에 ‘풍요’와 ‘무질서’의 상징이 된다. 풍요로운 뱃살은 어머니의 자궁, 내면의 은신처를 연상시키지만 동시에 통제 불가능한 욕망의 잔해처럼 보인다. 남성은 이 이중적 이미지를 견딜 수 없어 부정한다.

그러나 여기엔 거꾸로 들리는 진실이 있다. 사실 그들은 그 부피에 홀려 있다. 단지 스스로 홀린다는 사실을 견디지 못한다. 배 한 조각이 드러나는 순간, 그들은 ‘나는 지금 네 몸을 탐내는 게 아니라 내가 가지지 못한 여유를 탐내는 것’이라는 불편한 자기 인식에 부딪힌다.


공중화장실, 3분 42초

혜진은 첫 데이트 전날, 백화점 화장실에서 삼각대를 세우고 자신의 배를 찍었다.

앞범, 옆범, 뒤범. 사진을 45도씩 돌려가며 비교하고, 살이 접히는 주름마다 아이보리색 파운데이션을 꼼꼼히 두른다. 다 지우고 다시 그리기를 반복하다가, 결국 눈물이 날 것 같아 변기 뚜껑을 닫고 앉았다.

그날 밤, 만난 남자는 레스토랑에서 훈제오리를 시켰다.

“많이 먹어도 돼. 너무 마르지 않은 게 좋더라.”

혜진은 귓가에 맴도는 그 말을 믿고 싶었다. 하지만 숟가락을 놓는 순간, 그는 휴지를 건네며 말했다. “나 오늘 좀 아픈 것 같아. 다음에 보자.”

그의 시선이 혜진의 배를 흘기며 빠르게 스쳤다. 그래, 당신은 아픈 게 아니라 겁먹은 거야.


배꼽 아래 숨겨진 나선

우리는 사실 뱃살을 통해 타인의 공허를 바라본다. 복부가 부풀어오르는 순간, 상대는 내가 채워야 할 퍼즐 조각이 아니라 나를 채워버릴 거대한 구멍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그래서 그들은 도망친다. 도망치는 깊은 이유는 ‘나는 너를 탐닉할 수 없다’가 아니라 ‘네가 나를 채울 수 없다’는 절망 때문이다.

사라진 연인들은 결국 이 절망을 견디지 못해 우리 곁을 떠났다. 하지만 그 절망이야말로 우리가 뱃살 뒤에 숨겨 둔 진짜 욕망이다.

너는 내가 아니라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부분을 사랑하길 바랐던 건 아니었니?


문이 닫히는 소리

밤마다 냉장고를 열 때마다 배가 한 겹 더 늘어난다. 스트레칭은 안 하고, 다이어트는 내일로 미룬다. 그리고 매번 새로운 사람이 사라진다.

자꾸만 사라지는 이유가, 과연 ‘내 배’ 때문일까? 아니면 그 배 안에 숨겨둔 내가 누군가에게 얼마나 깊이 파묻히고 싶은지를 들킨 때문일까.

다음 사람이 너의 배를 본 순간,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리고 넌 그 표정 뒤에 숨겨진 자기 혐오를 볼 수 있을까.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릴 때, 넌 아직도 네 뱃살을 탓할 거니? 아니면 그 누군가가 사실은 네게서 도망치는 게 아니라 자기 안의 공허로 도망치는 거라는 걸 깨달을 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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