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왔어? 문 잠갔으니까, 슬슬 들어와.”
문 앞에 선 도윤은 운동화 끈이 풀려 있는 것도 모른 채 손에 든 와인 한 병을 꽉 쥐었다. 초인종을 누르기도 전에 현관문이 살짝 열렸고, 반가운 얼굴 대신 슬리퍼 하나가 내밀어졌다. 재인의 발이었다. 발가락만 남긴 채 문 틈 사이로 스며드는 그녀의 목소리는 잔잔했다.
“도윤아, 여기 들어오면 아무것도 묻지 마. 대답도 하지 마. 그냥 느껴.”
내 안에 잠든 감시자가 깨어난 순간
도윤은 ‘도망’이라는 글자를 먼저 보았다. 분홍색 초대장 끝자락에, 아주 작고 연필로 서투르게 쓰여 있었다. 누가 봐도 지워야 할 것 같은, 하지만 일부러 남겨 놓은 것 같은 글자였다. 그날부터 도윤의 머릿속엔 재인과 그녀의 남편 민수가 둘러앉은 식탁 위에서 자신을 어떻게 쪼개어 먹을지 상상이 꽃을 피웠다.
아니야, 절대 그럴 리 없어. 그들은 그냥 7년 차 부부일 뿐이야.
하지만 왜 하필 나인가. 왜 그 둘의 눈빛은 매번 나를 관통할 때마다, 내가 그들의 침대 옆에 이미 누워 있는 환영을 비추는 걸까.
실화처럼 쓴 두 사람의 기록
사례 1. '지은'의 편지
나는 지은. 스물여덟, 디자이너. 민재와 서연이라는 부부는 우리 사무실에서 만난 ‘죽마고우’였다. 어느 금요일, 그들이 처음으로 나를 둘이서 만나자고 했다. 민재가 한 말이 지금도 귀에 선명하다.
민재: 지은아, 우리가 너무 편해졌나 봐. 너 없이는 술도 안 취해.
그날 밤은 3차, 4차로 이어졌고, 택시 안에서 서연이 내 손등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서연: 집에 같이 갈래? 민재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더 가지고 있대.
그리고 나는 갔다. 현관문 닫히는 소리, 문고리에 걸린 재킷 냄새, 그리고 침대 끝에 놓인 한 장의 스티커. ‘도망’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날 밤 그들은 나를 두고 미끄러지듯 서로를 탐했다. 나는 구경꾼이었다가 주인공이 되었다가 다시 구경꾼이 되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나는 혼자였다. 민재는 출근했다며 쪽지만 남겼고, 서연은 머리를 묶은 채 거실에서 커피를 내렸다. 모두가 평범했다. 너무 평범해서 오히려 불안했다.
사례 2. '재혁'의 녹음
재혁, 서른둘, 의대생. 그는 동아리 선배 부부인 희진과 진우에게서 비슷한 초대를 받았다. 희진의 목소리가 담긴 녹음 파일이 메일로 왔다.
희진: 재혁아, 오늘 진우랑 나, 둘이서 네 얘기를 많이 했어. 너랑 있으면 우리가 더… 뜨거워지더라고. 와줄래? 모텔은 내가 잡을게. 끝에 네가 싫증 날 때까지 문은 열려 있을 거야.
재혁은 갔다. 그날 밤은 지은과는 달랐다. 그들은 처음부터 재혁을 끼어 안았고, 재혁은 느꼈다. 자신이 그들의 결핍을 채워 주는 ‘도구’라는 사실을. 그러나 그 도구는 금세 녹슬었다. 희진이 재혁의 귀에 속삭였다.
희진: 너, 언제까지 도망칠 생각이야?
우리가 거기에 서 있는 이유
왜 우리는 이미 짜인 퍼즐에 끼워지는 조각이 되고 싶어할까. 왜 금기의 문턱을 넘는 순간, 오히려 안도감이 밀려오는 걸까. 심리학자들은 ‘대리만족’ 혹은 ‘위험 선호’라는 단어를 쓴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 차갑다.
나는 단지, 누군가의 관계 속에 잠시 스며들어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듣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커플은 둘이라는 안정을 믿고, 나는 그 안정 위에 서서 잠시 눈을 감는다. 둘째, 둘은 나를 통해 서로를 더 뜨겁게 바라보고, 나는 그 뜨거움의 잔해 위에서 홀로 타오른다. 그리고 아무도 나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다. 나는 도구이자 목격자이자 흔적이다.
당신은 아직도 그 문 앞에 서 있는가
인터폰 너머에서 들리는 웃음소리, 초인종이 울린 후 살짝 열린 문, 그리고 안쪽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한 소절. 당신이 손에 든 초대장 끝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지만, 당신은 이미 알고 있다. 오늘 밤만큼은 도망칠 곳이 없다는 것을.
그렇다면, 당신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겠는가? 아니면 영원히 밖에서 들려오는 숨소리만 듣고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