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엄마, 엄마!”
세 돌 아기가 침대 밑에 숨은 내 핸드폰을 들고 달려온다. 남편은 거실 소파에서 스마트폰 게임에 열중하고, 어린아이들이 질질 끌던 장난감은 이미 발등에 박혀 피가 난다.
순간 나는, 이 순간조차 내 몸뚱아리는 엄마의 몸이라는 걸 깨달았다. 한 치의 여자로서의 틈도 없다. 심지어 화장실에 들어가도 문을 잠그지 못한다. 손잡이를 두드리는 작은 손때문에.
검은 침대 밑의 숨겨진 지갑
그날 밤 남편은 늦게 들어와 곯아떨어졌다. 나는 침대 밑에 숨겨둔 작은 지갑을 꺼냈다. 안에는 지난달 생일에 동아리 후배가 준 향수 샘플 한 방울, 그리고 한 장의 카드가 들어 있었다.
"언니, 아직도 레드립이 잘 어울려요."
홍조를 띤 한 문장. 그게 전부였지만, 나는 한참을 그 글자를 쓰다듬었다. 남편은 나에게 이미 두 해째 생일 선물을 깜빡하고 있었다.
진주의 거짓말
사촌동생 결혼식장, 분홍 원피스를 입은 서른여덟의 진주는 웨딩마치를 맞으며 눈시울을 붉혔다. 아이 둘을 둔 엄마라곤 믿기지 않는 탄탄한 어깨라인.
식사 도중 변기 안쪽에서 그녀가 메모지를 꺼냈다.
너랑 나, 나중에 같이 놀러 갈래?
연락처 남길게
그건 첫사랑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에게는 첫 키스도, 첫 손잡기도 없는 남자. 다만 남편과 결혼 직전, 한 번 스쳤던 동호회 선배였다. 식장 한켠에서 그는 아내와 아이를 데리고 음식을 떠먹이고 있었다.
진주는 그 메모를 휴지통에 버렸다가, 다시 주워서 주머니에 넣었다. 그 순간, 그녀는 아이들의 엄마라는 이름 앞에서 먼저 여자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살아왔다는 걸, 스스로에게 고백했다.
은밀한 욕망의 온도
우리가 왜 이 끈적한 마음을 끌어안고 계속해서 숨죽여야 할까. 아이들이 잠든 뒤, 냉장고 앞에서 시원한 물을 마시다가 문득 떠오르는 그 사람의 손등. 생리대를 사러 마트에 갔다가, 향수 테스터를 뿌려보는 3초의 쾌감.
심리학자들은 말한다. ‘욕망의 금기 현상’이라고. 금지된 대상일수록 오히려 더 선명히 다가온다고. 하지만 그들이 모르는 게 있다. 지금 내게 금기가 아닌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 단지 내가 원하는 게 나 자신이라는 걸.
잊혀진 여자의 이름
지하 주차장, 차 안에서 나는 5분간 나 자신의 이름을 불러봤다.
“채원아.”
그러나 메아리조차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어린아이가 우는 소리가 계단 쪽에서 울려 퍼졌다. 혹시 내 아이인가 싶어 허겁지겁 달려갔지만, 낯선 엄마가 아이를 안고 위로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알았다. 나는 엄마인 동시에, 아직 누군가의 사랑스러운 여자이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단지 그 사실을, 지금 이 순간, 남편에게 끄집어내고 싶지 않았을 뿐.
방금, 문을 두드리는 소리
지금도 침실 문을 살짝 열어젖히는 남편의 숨소리가 들린다. 혹시 내가 아직 모르는 욕망을 꿈꾸고 있었는지. 아니면 그저 내일 아침 빨래를 돌리라는 부탁을 하려는지.
문을 열기 전 잠깐 나는, 당신도 나처럼 누군가의 남편이자 아빠라는 이름 옆에, 한때는 뜨거웠던 연인이라는 사실을 잊고 사는지 궁금해진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이름으로 다가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