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거짓말은 아침 커피 한 모금처럼 자연스러웠다
"나 전에 큰 사고 친 적 없어." 수진이 그 말을 했을 때 테이블 아래 손가락이 살짝 떨렸다. 연인이 보기엔 전혀 아니었다. 커피 잔을 드는 손만 똑바로 보였으니까. 그러나 거짓말은 숨결이 달랐다. 뱃속 깊은 곳에서 차가운 바람이 올라왔다. 세 번째 데이트. 거짓말은 꽤 잘 먹혔다. 무사히. 그날 이후 수진은 매일 같은 거짓말을 손짓했다. 아주 작고, 아주 밝은 거짓말. 누구에게도 안 들킬 것 같은.
들키면 끝장이야. 정말 끝장일까? 아니면 나도 몰랐던 내 끝을 마주할까?
욕망의 해부 — 왜 숨겨야 더 달콤한가
비밀은 관계의 희생제물이다. 누군가를 끌어안고 싶을수록 뒤통수에 날카로운 이를 들이댄다. 숨기는 순간 ‘나’는 두 명이 된다. 한 명은 연인에게 보여줄 착하고 맑은 사람. 다른 한 명은 깊은 심연 속에서 잿빛 과거를 씹는 괴물. 괴물은 점점 배가 불러 온다. 고백하고 싶은 욕망도, 끝까지 가릴 욕망도 — 결국 둘 다 사랑이 죽는 걸 목격하는 데서 오는 쾌감을 노린다.
사람들은 종종 말한다. “비밀은 상대를 배신하는 거야.” 하지만 정작 내면은 속삭인다. 아니야. 비밀은 나를 배신하는 거야. 연인이 아니라. 내가 내 과거를, 내 죄를, 내 타락을 배반한 거야. 그리고 그 배신감이 짜릿할 때가 있다. ‘나는 너만큼은 지켜줄 수 있어’라는 자만심. 결국엔 그 자만심을 깨부수는 날이 온다.
첫 번째 이야기 — 지하철 2호선 끝자락에서
지혜는 매주 토요일 남편 민재와 함께 동네 와인바에 갔다. 민재는 지혜가 와인 한 잔만 마셔도 볼이 붉어지는 걸 좋아했다. “순진해서.” 민재는 그 표현을 즐겼다. 그러나 지혜의 순진은 오래전 서울역 뒷골목에서 찢겨 있던 것이었다. 2013년 봄, 그녀는 이름 없던 클럽에서 MDMA를 팔았다. 한 알에 이십만 원. 하룻밤에 스무 알 넘게 팔았다.
그 돈으로 얻은 게 뭔가? 아파트 보증금 한 달 치. 친구 하나 죽음. 경찰 조서 한 장에 도장만 찍고 풀려난 운. 그리고 평생 민재에게 말할 수 없는 두 글자, ‘마약’. 지혜는 민재와 말다툼 끝에도 한 번도 입 밖에 낸 적 없다. 대신 매번 민재가 잠든 새벽 3시 15분, 지하철 노선도 앱을 열어 서울역을 찍어본다. 그곳에 지혜의 23살이 묻혀 있다. 뼈와 살이 고스란히.
두 번째 이야기 — 에어컨이 고장난 7월
도현은 5년째 사귀는 예진에게 결혼을 약속했다. 예진은 웨딩홀 예약을 하고, 드레스를 골랐다. 그러나 도현의 머릿속에선 2019년 7월이 계속 재생된다. 더위에 찌든 원룸, 에어컨은 고장 났고, 땀에 젖은 여자가 울었다. 그 여자는 도현의 전 회사 동료였다. 그리고 도현은 그날 그녀를 밀쳐낸 후, 회사를 그만뒀다.
여자가 임신했다는 소식은 3개월이 지나서야 들었다. 연락은 끊긴 지 오래. 임신은 중절되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아이는 세상에 나왔을지도. 도현은 예진의 손에 반지를 끼워주면서 그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갔을지도 모른다고 상상했다. 너는 결혼 반지 껴고, 어딘가에 네 피가 흐르는 아이가.
왜 우리는 이것에 끌리는가 — 죄책감이 주는 권력
정신의학자 로버트 칼프만은 “죄책감은 관계에서 가장 은밀한 권력”이라 했다. 숨기는 자는 상대가 모르는 무게를 지닌다. 상대는 그 무게를 결코 측정할 수 없으니까, 늘 밀리고 만다. “미안, 내가 잘못했어”라는 말보다 더 강력한 권력은 “사실은…”이라 끊는 말 뒤에 숨겨둔 문장이다.
동시에 우리는 상대의 비밀을 끝까지 듣지 못할 때 더 집착한다. 들통난 비밀은 폭탄이 되고, 숨겨진 채로 남아 있을 때는 황금이다. 세계에서 가장 무거운 금덩어리. 들고 있으면 팔이 찢어지지만, 내려놓으면 남는 게 없다. 그러니까 우리는 숨기는 쪽으로, 또 숨기고 싶은 쪽으로 계속 미끄러진다. 결국은 서로의 내면을 파먹는 거대한 호수 위를 서 있다. 발 아래는 영원히 흔들리는 얼음판.
마지막 질문 — 당신은 누구를 위해 묻고 있나
그래서, 잘못된 과거를 꺼내놓는다고 해서 사랑이 소생할까. 아니면 결국 죽음만 확인하게 될까. 아니면 더 증오스러운 질문이 남는다. 과연 그 고백은 상대를 위한 것인가, 아니면 숨겨왔던 자신을 구하기 위한 몸부림인가. 고백이 끝난 뒤에도 당신은 아마 그 질문을 입안에 씹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고백할까. 아니면 죽을 때까지 숨길까. 결정은 간단해 보인다. 그러나 당신이 선택한 순간,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죽는다. 사랑이든, 당신 안의 괴물이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