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안 하면 안 되겠니?”
벌써 네 번째라는 핑계로, 그가 지갑에서 꺼낸 건 콘돔 한 장도 아닌 지하철 티켓이었다. 찌그러진 종이 위에 선명한 주황색 번호가 찍혀 있었다. 서울역에서 수원행.
“오늘만큼은 그냥 느껴보자. 너랑 나, 피부 그대로.”
내가 잠깐 머뭇거리자, 그가 이마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피임은 내가 책임질게. 걱정하지 마.”
사라진 벽
콘돔이라는 투명한 장벽이 사라지는 순간, 느껴지는 건 단순한 온도 차이만이 아니었다. 마치 몸뚱이 한가운데를 파고드는 반가운 습함. 그러나 그 습함 속엔, 나도 모르게 터지는 ‘우리는 더 이상 남남이 아니야’라는 착각이 끼어 있었다.
사실 그는 단 한 번도 피임 책임을 지지 않았다.
진우의 서랍
진우는 결혼 2년 차 회사원이다. 첫 만남부터 그는 “콘돔은 느낌을 죽인다”를 주문처럼 되뇌었다. 아내 수진은 처음엔 고개를 흔들었다가, 네 번째 관계에서 마지못해 허락했다.
그날 이후, 진우는 콘돔 없음 = 사랑의 증표로 받아들였다. 약 1년 뒤, 수진이 생리 3주 연속으로 밀리자 진우는 냉정하게 말했다.
“우리 아이 아니면 너무 섭섭한데?”
수진은 병원에서 임신 중이라는 얘길 듣고도, 진우의 얼굴에서 어떤 감동도 찾지 못했다. 오히려 그의 눈빛은 차분한 승리감에 젖어 있었다.
유나의 발견
유나는 애인 민호와 9개월째 만나고 있었다. ‘콘돔 없이 해 본 남자’라는 콤플렉스에 끌려, 유나는 민호의 요구를 한 번도 거절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토요일, 유나는 민호의 노트북을 열었다. 구글 드라이브에 있는 숨겨진 폴더. 제목은
정면 대비하자, 민호는 당연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남들도 다 그래. 진짜 느낌을 증명하는 건데.”
왜 우리는 벗어나고 싶을까
심리학자들은 “베어부름증(invitation anxiety)”이라 부른다. 상대가 나를 완전히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불안감을, 피부 장벽 하나라도 걷어내면 해결할 수 있을 거라는 착각.
콘돔 없는 섹스는 단순한 촉각적 욕망이 아니라 ‘나를 온전히 사로잡아라’는 거대한 소유욕이다. 상대의 몸에 자신의 DNA를 남긴다는 비현실적 동기.
그것이 실제 임신으로 이어지면, 욕망은 책임으로 변하고, 책임은 또 다른 집착을 낳는다.
당신은 언제부터였나
당신도 한 번은, 혹은 지금도, “콘돔 없이 해 보고 싶다”는 말을 건네거나 듣고 있다면, 물어본다.
그 순간, 당신이 정말 원한 건 그들의 몸이었나, 아니면 그들의 선택지를 완전히 지배하고 싶었던 욕망이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