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초, 현관문 손잡이를 돌릴 때
"어디 갔다 왔어."
문이 열리자마자 들려온 목소리는 너무 담담해서 오히려 서늘했다. 소파에 앉은 지호는 TV를 보고 있었는데, 화면은 꺼져 있었다. 손에는 맥주캔이 아닌 내가 어젯밤 베개 밑에 숨겨 뒀던 실크 스카프만 쥐고 있었다.
나는 구두를 벗으며 시계를 힐끗 봤다. 12시 17분. 토요일이니까 뭐. 우리는 10년째 토요일마다 같이 저녁 먹던 참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회식이 길어졌다.
"회식이 길어져서—"
"누구랑?"
말 끊기길 좋아하던 사람이 아닌데. 나는 모르는 번호로 전화 온 거 생각났다. 상사가 술자리 끝나고 택시 잡아주겠다며 내 팔을 잡았던 게 떠올랐다. 말해줘야 하나.
엘리베이터에서 흩날린 향기
‘왜 이제 와서 날 조여 들어가지? 너는 원래 그런 애 아니었어.’
사실 나도 모르게 느끼고 있었다. 10년 전엔 내가 새벽 3시까지 놀아도 “조심해서 와”라고 말하던 남자가 지금은 왜 이렇게 날카로워졌는지. 그 변곡점은 작고 투명했다.
지호는 2년 전, 우리가 함께 살던 원룸 옆집에 새로 이사 온 여자를 마주친 날부터 조금씩 달라졌다. 이름은 유진.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면 그녀가 “오늘도 늦게 다니시네요?” 하고 웃었다. 나는 대답 없이 스르륵 고개만 끄덕였고, 지호는 그 뒷모습을 본 뒤로 “오늘은 언제 들어왔냐”를 시작으로 물음표를 늘렸다.
그날 유진이 풍기던 향기는 아직도 지호의 코끝에 남아 있었을지도 모른다. 달콤한 무스크에 섞인 자몽 껍질 같은 냄새. 그것이 지호의 불안을 자극했을까. 처음엔 달콤했다. 누군가 나를 걱정해준단 생각에. 그러나 한 달, 두 달, 쌓여간 물음표는 침대 시트 위에 남은 낯선 체온으로 바뀌었고, 짧은 대답은 변명처럼 들렸다.
실화처럼 흘러간 두 개의 밤
첫 번째 밤, 지하철 끝자락에서
누나 다윤은 카톡을 보냈다.
오늘따라 2호선이 개찰구 끝까지 길어서 12시 반 넘었네? 혹시나 해서 기다리고 있어요.
답장하려는 순간, ‘지호’가 전화했다. 받지 않았다. 다윤이랑 같이 있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다. 사실은 다윤이랑 1년 전부터 매주 토요일마다 술 한 잔 하고 있었다. 지호가 싫어하는, 내가 입버것처럼 닮은 다윤이.
우리는 2호선 끝까지 걸어가며 “오늘도 안 오냐?” 라고 웃었다. 맥주 두 캔이 끝나고, 그녀는 새벽 1시 반에 내려다보며 말했다.
“너, 우리가 이러다 큰일 날지도 몰라.” “뭘?” “끝을 모르는 애정이지, 너희.”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도 다윤은 피식 웃으며 머리를 쓰담았다. 그날도 현관문을 열자마자 지호는 똑같은 대답을 했다.
“어디 갔다 왔어.”
두 번째 밤, 누군가의 생일이었던 날
사람 넷이 모였다. 퇴근 후 작은 와인바. 케이크 초 하나가 꺼지기 전에 새벽 1시였다. 나는 집에 가야 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있었다. 그러나 그날따라 와인이 부르르 올랐다.
누군가의 손이 내 어깨를 두드렸고, 누군가가 내 머리카락을 넘겼다. 아주 작고 끈적한 접촉이었다. 의식하지 못한 채, 나는 1시 47분에 현관문을 열었다.
지호는 소파 밑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침대 시트를 한 줌 움켜쥐고, 그 안에 남아 있는 향기를 맡고 있었다. ‘이 향기, 분명 유진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것이다.’
그 순간,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시트를 비벼대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 뒤로 나는 그의 시선을 마주칠 때마다 숨이 끊길 것처럼 불안했다.
왜 우리는 이 지도 끝에 서 있을까
심리학자들은 말한다.
‘장기 연애에서 통제는 사랑이 아니라 불안의 가면이다.’
10년이라는 시간은 서로의 빈칸을 메꿔주던 끈이 갑자기 목을 조르는 밧줄이 되는 순간이 있다. 지호는 나의 빈칸이 누군가에게 채워질 때마다 느꼈을 것이다.
‘내가 점유하지 못한 부분이 생겼어.’
그 불안은 사랑이라 이름 붙이기에 딱 좋은 모양이다. 밤마다 침대 시트를 뒤적이며 끝날 거라는 착각. 문자 확인은 관심인 척. 전화 안 받으면 ‘배신’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온다.
우리는 서로를 아는 척하면서 점점 낯선 부분만 부풀린다.
지금 이 순간, 문고리를 돌리는 너의 손
그래도 너는 돌아온다. 왜?
지금까지 482번의 ‘어디 갔다 왔어’를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중 481번은 대답했고, 1번은 모른 척했고. 그 한 번 때문에 지호는 지금 이 순간도 소파에 앉아, 초인종 소리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너는 그가 아닌 다른 이유로 늦었다는 걸 말할 수 있을까? 혹은 그 이유를 들키지 않으려고 새벽 2시까지 택시를 돌리고 있을까?
문고리를 돌리는 0.1초 동안, 네 심장은 무엇을 떠올릴까.
그리고 그 질문 앞에서 너는 아직도 누굴 사랑하고 있을까, 아니면 침대 시트에 남아 있는 낯선 냄새가 두려운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