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까지 가지 않아도 돼, 그냥 같이 춤추는 거잖아."
준영은 아직도 그 말이 입안에 잔향처럼 남아 있다. 잠 못 드는 새벽마다 반복 재생되는, 영화 같은 한 장면.
불빛이 타는 순간
삼성동 G클럽, 오후 11시 47분. 준영은 처음 가본 지하 2층, 테이블 위 위스키 잔만 주황빛으로 떨렸다.
친구들이 옆 테이블 여자들에게 인사하는 통에 그만 혼자 남았다. 그때였다. 은진이 다가왔다. 초크 민소매에 청바지를 입은 여자. 머리에서 흘러내린 한 올 머리카락이 눈동자를 가렸다.
내가 먼저 온 걸까, 아니면 그녀가 날 골라낸 걸까.
"혼자야?" 그녀가 물었다. 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그럼 나랑 춤출래?"
땀이 섞이는 공기
베이스가 가슴을 때렸다. 은진의 몸이 준영의 몸에 스쳤다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1분, 2분, 5분. 시간은 흐르는데 세상은 멈춘 것 같았다.
이건 뭐지, 연애도 아닌데 전부를 건 듯한 기분.
그녀의 뒤통수 냄새가 코끝에 박혔다. 샴푸와 땀, 그리고 담배 연기가 섞인 독특한 향. 준영은 손을 허리에 얹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몸을 떨었다. 그러나 물러서지 않았다.
"여기 오는 건 처음이야?" 은진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응."
"나도. 그런데 재밌네."
90분의 늪
춤은 끝이 없었다. DJ가 트랙을 바꿀 때마다, 그들은 새로운 포즈로 맞붙었다. 허리, 팔, 가슴. 서로의 경계를 조심스레 넘나들었다.
준영은 생각했다. 여기서 키스하면 끝장이다. 그녀는 나를 어떤 남자로 기억할까.
은진이 갑자기 멈췄다. "나 갈래. 친구들이 기다릴 것 같아."
"번호..." 준영이 말꼬리를 흐렸다.
그녀는 미소만 지었다. 그리고 사라졌다. 준영은 그 자리에 서서 남았다. 온몸에 남은 그녀의 체온이 식어가는 게 느껴졌다.
타버린 자리
집에 돌아오는 택시 안. 준영은 손등을 봤다. 그녀의 아이섀도우가 묻은 흔적이 아직 남아 있었다. 그걸 닦지 않았다. 왠지 지우면 안 될 것 같았다.
나는 왜 아무 것도 안 했지? 아니, 왜 그렇게 하고 싶었지?
우리는 왜 춤을 추는가
심리학자들은 말한다. 클럽 춤은 현대의 ‘안식처’라고. 일상의 금기를 잠시 해제하는 의식이라고.
우리는 몸으로 대화한다. 손끝이 먼저 말을 건네고, 눈빛이 답을 한다.
그러나 준영은 아는 것 같았다. 그건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는 걸. 몸의 각인이라는 걸. 단 90분 동안의 촉각이 몇 년을 흔들 수 있다는 걸.
두 번째 남자, 태민
한 달 뒤, 태민은 강남역 NB2에서 비슷한 경험을 했다. 그는 민지라는 여자와 2시간을 넘게 춤췄다.
민지는 춤을 추다가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태민은 화들짝 놀랐다. 그러나 민지는 아무 말도 안 했다. 그냥 그렇게 있었다.
"우리 나가서 맥주나 마실래?" 민지가 물었다.
태민은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모르게... 나중에 후회할 것 같아서."
민지는 웃었다. "후회할 건 없어. 그냥 춤이잖아."
그녀도 사라졌다. 태민은 나중에 인스타그램에서 우연히 그녀를 봤다. 남자친구와 함께 찍은 사진. 그 사진을 보며 태민은 아, 그래도 나는 옳았어 라고 생각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래도... 했다.
욕망의 색
우리는 왜 이토록 빠져드는 걸까. 이건 단순한 성욕이 아니다. 누군가 나를 선택했다는 증거를 원하는 욕망이다. 한낮의 도시에서는 불가능한, 몸만으로 통하는 인정 말이다.
준영은 지금도 가끔 G클럽 근처를 지난다. 닫힌 문을 보며 그녀가 또 있을까 생각한다. 아니, 없을 것이다. 그날 밤은 현실이 아니었던 것처럼.
아직도 뜨거운 그리드
당신은 클럽에서 누군가와 춤을 춘 적이 있는가. 그리고 그날 밤을 지나친 것처럼 살아간 적이 있는가.
준영은 결국 그날 밤을 친구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말할수록 그 기억이 더럽혀질 것 같았다. 그러나 아침마다 거울을 보며 묻는다.
나는 왜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아무 것도 하지 못해서도, 이토록 더러워진 기분일까.
마지막 질문
당신은 지금도 그날 밤의 체온을 기억하는가. 아니면 괜찮은 척, 미련 없는 척 살아가는가. 그리고 그 미련이 언젠가 당신의 연애를 해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