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소된 거 맞아. 되돌릴 수 없어?”
대기실 텅 빈 모니터가 Cancelled라는 단어만 반복했다. 유미는 남편 민석의 손목을 흔들었지만, 그의 시선은 이미 날카로웠다.
민석의 목 근육이 올라갔다. 그 순간, 유미는 결혼 5년 만에 처음 본 얼굴을 목격했다.
공항 라운지의 형광등 아래, 민석의 눈동자가 잿빛으로 변했다.
그 눈빛은 슬픔도 분노도 아니었다. 오히려 짜릿한 해방감처럼 보였다. 마치 폭탄이 터지기 직전의 침착처럼.
첫 번째 파도
민석은 한숨도, 뭐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숙이고 입꼬리를 떨렸다. 유미는 그 미소를 두고 ‘실망’이라고 생각하려 했지만, 너무 밝았다. 아니, 너무 뜨거웠다.
항공사 직원에게 “다음 비행기로라도…” 하고 유미가 말하려 하자 민석이 손을 들어 막았다.
“안 가도 돼.”
“어?”
“여행, 망했잖아. 집에 돌아가자.”
그때 유미는 알았다. 민석의 눈빛은 슬픔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여행이 망가졌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오히려 안도감을 줬다는 걸.
두 번째 파도
두 달 뒤, 유럽은 극심한 폭우였다. 기차는 서 있는 채로 물에 잠겼다. 선반 위 가방은 흙탕물에 떠다녔다. 유미는 민석의 손을 꼭 잡았지만, 그의 손은 차가웠다.
이번엔 미소가 아니라, 입꼬리가 닳아 없어질 듯이 닫혔다.
“민석아, 괜찮아?”
민석은 대답 대신 눈을 감았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흔들리는 그의 눈동자는 유미에게 속삭였다.
네가 망쳤어. 네가 날 여기로 끌고 왔잖아.
유미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 말은 나오지 않았지만, 민석의 눈에서 읽혔다. 자신이 흔들리는 기차 안에서 멍하니 서 있던 동안, 민석은 그녀의 뒤통수를 노려봤다.
숨겨진 명령
유미는 뒤늦게 깨달았다. 민석은 여행을 망치고 싶어했다. 계획이 꼬이길, 예약이 취소되길, 비행기가 떨어지길. 그래야만 그는 정당한 이유를 얻었다.
너 때문에 망했다.
그 말 한마디를 위해.
민석이 원하는 건, 여행이 아니라 실패였다. 실패라는 무게를 유미에게 덮어씌울 수 있는 찰나의 기회. 그래서 그는 조용히, 고의로 여행을 망쳤다.
짐 싸는 날 밤. 민석은 숨겨놓은 여권을 지갑 깊숙이 집어넣었다. 유미가 “여권 다 챙겼지?” 하고 묻자, 그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공항에서 여권이 없다고 발견된 건 예상대로였다. 유미는 자기 탓을 했다.
왜 우리는 실패가 필요한가
심리학자 애덤 필립스는 말했다. ‘사랑은 우리가 모르는 상태에서 가장 자유롭다’고. 아는 순간, 우리는 통제하려 든다. 그래서 결혼은 실패를 설계한다. 실패를 통해 상대를 책임자로 만들어, 자신은 피해자로 남는다. 가장 안전한 승리다.
민석도 그랬다. 여행이 망가지면, 유미는 그를 달래야 했고, 그는 달래지는 동안 전적으로 옳았다. 실패는 그를 유미의 구원자가 아니라, 심판자로 만들어줬다. 그는 유미의 죄를 재판하고, 유미는 스스로를 처벌했다.
돌아가는 길
결국 유미는 집으로 돌아왔다. 민석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TV를 켰다. 유미는 여전히 여행 가방을 열지 못했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건, 너의 욕망이 내 몫임을 깨닫는 순간이다.
그래서 유미는 물었다. 그리고 당신도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우리가 망가뜨린 여행들, 정말로 사고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