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심리연구소 사랑과 연애의 심리학

차가워진 체온이 떠오르면, 나는 그의 숨소리를 다시 듣는다

나는 그를 늙다고 버렸다. 그런데 잠든 사이, 그의 체온이 차가워지는 소리마저 그리워졌다.

뒤늦은 후회체온욕망과 권력잔상
차가워진 체온이 떠오르면, 나는 그의 숨소리를 다시 듣는다

그날 동탄역 뒤편 모텔 복도는 햇살 한 점 없었다. 시멘트 벽에 스며든 담배 연기와 세탁실 냄새가 뒤섞여 숨을 조였다. 민수는 문 앞에서 잠시 멈춰 서더니, 주머니에서 껌을 꺼내 입에 씹었다. 손등에 난 3cm 남짓한 흉터가 하얀 플라스틱 포장지를 비추며 번쩍였다. 세 살 때 부엌에서 떨어뜨린 칼에 베인 자리래. 한 번 말한 뒤로 다시 꺼낸 적 없는 사연이다.

방 안에 들어서자 그는 조용히 코트를 걸었다. 회색 울 코트는 겨드랑이 부분이 빳빳하게 굳어 있었다. 건설 현장 출장을 마치고 직접 온 거야, 그는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했다. 민수는 토목 기술자였다. 늦은 밤까지 도면을 붙들고 있던 탓일까, 손톱 아래로 아직도 미세한 회색 석회 가루가 배어 있었다. 그 가루가 내 팔뚝에 묻을 때마다, 나는 문득 공사장 철판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냄새를 떠올렸다.

우리는 세 번째였다. 처음엔 서로의 나이 차이를 숨기지 않았다. 스물아홉, 마흔. 솔직히 그는 나의 기준이었다. 내가 원했던 건 ‘후배’가 아니라 ‘선배’였고, ‘선배’가 아니라 ‘늙은이’였다. 그 늙은이는 내가 옷을 벗을 때마다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서 있었다. 마치 내가 곧 부서질 듯 조심스러워했다. 그리고 한참을 바라보다, 뜨거운 손바닥을 내 어깨에 얹었다. 손등의 흉터가 살짝 닿는 순간, 나는 그가 아프게 살아왔다는 걸 실감했다.

그날도 비슷했다. 유리창 너머로 흐린 겨울 하늘이 노랗게 물들고 있었다. 민수는 이불을 걷어 올린 채 잠든 척했다. 이마에 난 두세 줄 주름이 조용히 움직였다. 나는 침대 끝에 앉아 그의 숨을 세어 보았다. 1, 2, 3… 열 번째 호흡이 끝나갈 무료, 문득 생각이 들었다. 이제 그만 만나자. 그 이유는 단순했다. 그는 늙었고, 나는 그 사실을 눈으로 확인했다. 머리카락이 빠진 두피, 술 한 잔에 붉어지는 눈꺼풀, 그리고 잠든 사이 새어 나오는 가냘픈 코 골이. 다만, 끝이라고 선언하는 순간에도 나는 그의 냄새를 맡고 있었다.

나는 말했다. "민수 씨, 그만해요." 그는 잠든 척하던 눈을 떴다. 흐릿한 눈동자가 나를 향해 있었다. 입술은 꿈에서 말을 건네듯 떨렸다. 잠시 후 그는 눈을 감았다. 아무 말도 없었다. 단지, 천장을 향해 내민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 떨림이 사라지는 데는 채 십 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우리는 다시 만나지 않았다.

며칠이 지났을까. 나는 새벽 세 시에 눈을 떴다. 침대 한편이 텅 비었다. 어두운 방 안에서 내가 처음 떠올린 건 그의 체온이었다. 왜 차가워지는 걸까. 민수는 잘 때도 몸을 한쪽으로 구부정이 말았다. 그래서 어깨와 허리 사이에 작은 굴이 생겼다. 그 굴에 내가 들어가면, 그의 체온이 먼저 느껴졌다. 따뜻하기보다는 살아 있음이 먼저였다. 그 살아 있음이 차가워지는 소리를 지금도 귀로 들었다. 그러고 나서, 나는 그의 숨소리를 그리워하기 시작했다.

혜진과 소연이 나타났다. 혜진은 같은 팀 디자이너, 소연은 대학 동아리 후배였다. 둘 다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남자들을 떠났다. 혜진은 42살 ‘형진’을, 소연은 39살 ‘선배’를. 혜진은 말했다. "형진이는 키스할 때 숨소리가 너무 커서 짜증 났어. 손등 주름도 많고. 그래서 차버렸어. 근데…" 소연도 똑같은 말을 했다. "선배는 눈 밑 주름이 깊고, 머리도 빠졌어. 그래서 차버렸어. 근데…"

그러나 우리는 ‘그러나’ 뒤에 숨긴 말을 꺼내지 않았다. 혜진은 형진이가 자신의 손등을 어루만질 때마다 눈이 반짝였다고 했다. 소연은 선배가 자신을 부르던 목소리를 지금도 녹음하듯 귀에 꽂고 다닌다. 나 역시 민수의 흉터를 만질 때마다 그의 몸이 떨렸던 걸 기억했다. 그 떨림은 ‘원함’이었다. 그리고 그 원함이 우리를 지배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뒤늦게 깨달았다.

나는 새벽 다섯 시, 잠을 포기하고 일어났다. 발코니로 나가 창문을 열었다. 겨울 공기가 얼굴을 스쳤다. 그때 어떤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공사장의 젖은 철판 냄새, 그리고 민수의 손끝에 남은 석회 가루 냄새. 나는 고개를 돌렸다.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빈 공기 속에서, 나는 그의 체온이 서서히 차가워지는 과정을 다시 목격했다. 뜨거운 손바닥이 식어 가며, 손등 흉터가 희미해지고, 마지막으로 숨소리가 사라지는 순간. 그 순간이 끝나자, 나는 알았다. 나는 그를 버린 게 아니라, 그가 나를 놓아준 것이었다.


그가 떠난 뒤, 나는 매일 밤 그의 체온이 스러지는 소리를 듣는다. 문득 잠에서 깨면, 차가워진 침대 한쪽을 손끝으로 더듬는다. 그곳엔 아무것도 남지 않았지만, 나는 여전히 살아 있음을 확인한다. 그가 남긴 체온은 이미 식었지만, 그 체온이 떠오르면 나는 다시 그의 숨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나는 깨닫는다. 나는 그를 떠나온 게 아니라, 그가 나를 놓아준 것이라는 걸. 그리고 나는, 그 사실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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