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불청객
밤이면 낯선 신혼집 담벼락에 그림자 하나가 붙는다. 내 발끝은 2년 만에 새로 포장된 인조잔디 위를 삼키듯 걷는다. 2층 베란다엔 아직도 우리가 함께 고른 화분이 있다. 아니, 있었다. 지금은 누군가 새로 산 하트 모양 꽃으로 대체되었겠지.
"너도 알지? 이건 순찰이 아니야. 단지 그가 잘살고 있는지, 나 없이도 웃는지 확인하려는 거야.
그리고 나는 매일 그를 확인한다. 웃는지, 안 웃는지."
2. 17일차 밤, 02:14
창문은 반쯤 열려 있다. 시트지 하나 없는 새 창틀은 누가 봐도 ‘새 신부가 싫어했나 봐’라고 말한다. 실내 조명은 따뜻한 황색. 그래도 나는 섬광처럼 차가운 기억만 선명하다.
그가 처음으로 그녀를 소개했을 때, 나는 그녀의 목걸이에 시선이 먼저 갔다. 연한 골드 체인 위로 떨어지는 작은 하트. 그걸 보며 문득 그가 나에게 줬던 첫 목걸이가 떠올랐다. ‘똑같은 걸 또 주나?’ 그걸로 끝이었다.
나는 천천히 창살 사이로 시선을 밀어 넣는다. 그리고 본다—그가 아닌, 그녀의 실루엣. 흰 셔츠 차림으로 머리를 흔들며 다이닝 테이블 위에 무언가를 놓는다. 아마도 밤참일 테다. 나는 혀끝으로 상처 입은 입술을 핥는다. 그녀도 내가 만들어준 음식을 먹을까. 그가 먹던 것과 똑같이?
"흰 셔츠도, 하트 목걸이도, 내가 먼저였단 말이야.
하지만 먼저였던 건 늘 먼저 떠나야 했던 나였고."
3. 23일차 밤, 01:57
이번엔 발코니 불이 꺼져 있다. 대신 거실 스탠드 하나만 홀로 켜져 있다. 나는 미끄러지듯 담장 끝으로 다가가 풀밭에 엎드린다. 냄새가 난다. 새로 깔인 흙과 잔디, 그리고 은은한 향수 냄새—아, 그녀가 쓰던 거다. 그는 늘 민감한 코를 가졌으니까, 새 아내가 뿌린 냄새에 취해 있겠지.
차가운 흙이 무릎을 적신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문틈 사이로 새어 나오는 그림자를 따라간다. 그림자는 거실 벽에 붙어 있다. 두 명이다. 머리가 맞닿는 형태. 그림자만으로도 키스가 느껴진다. 나는 입을 다물 수 없다. 처음엔 숨을 죽이다가, 이내 흙 냄새를 깊게 들이마신다.
"나는 그림자만으로도 불타오를 수 있다는 걸, 너도 알았으면 해.
그림자는 말이 없어서, 그래서 더 잔인해."
4. 30일차 밤, 02:38
오늘은 이상하다. 불이 모두 꺼져 있고, 집 안은 깜깜하다. 내가 들키긴 했을까. 아니면 그들이 여행을 떠났을까. 나는 담벼락에서 발을 떼고, 천천히 정원 쪽으로 걸어간다. 정원엔 아직도 우리가 심었던 라벤더가 있다. 그는 알레르기가 있어서 한송이만 꺾어도 재채기를 했지만, 나는 그 냄새를 좋아했다.
지금 라벤더는 꺾여 있다. 누군가 심신 안정용이라도 만들려고 꺾어 놓았다. 나는 라벤더 아래로 무릎을 꿇고, 잎 사이에 남은 꽃잎 하나를 집어 든다. 향기는 여전하다. 하지만 그 향기 속에는 더 이상 우리 둘만의 비밀이 없다. 나는 꽃잎을 한 입에 넣고 씹는다. 쓴맛이 올라온다. 이 쓴맛이야말로 내가 느낄 수 있는 유일한 현실이다.
"쓴맛은 맛이 아니야. 기억이야.
그 기억이 끝나는 곳에 나는 아직 서 있다."
5. 45일차 새벽, 03:05
그날도 나는 왔다.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베란다에 그녀가 서 있다. 하얀 잠옷 차림, 머리를 헝클어놓고 담배를 문다. 나는 처음으로 그녀를 마주친다. 시선이 닿는 순간, 그녀는 담배를 끄고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말한다. 아니, 입술만 움직인다.
‘가세요.’
나는 꼼짝할 수 없다. 발이 풀밭에 뿌리내렸다. 그녀는 한 걸음 물러서 창문을 닫는다. 유리가 닫히는 소리가 낮게 울린다. 그리고 불이 꺼진다. 나는 서 있다. 라벤더 향기만이 머리카락에 남는다.
그날 이후, 나는 더 이상 그 집 앞을 맴돌지 않았다. 대신 나는 라벤더 잎 하나를 지갑에 넣고 다닌다. 쓴맛이 올라올 때마다, 나는 알게 된다. 나는 아직 그 집 앞에 서 있지만, 동시에 그 집 안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가지 말라고 했을 때 나는 그 말이 ‘사랑하니까’가 아니라 ‘미련 없어’라는 뜻이라는 걸 알았다.
그래도 나는 그 말 한마디를 들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오늘을 버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