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2시 17분, 침대는 얼음장이었다. 서연은 이불 속에서 두 발을 오므려도 엉덩이 끝까지 차가운 바람이 스며들었다. 민수는 없었다. 반대편 침대는 흔적도 없이 평평했다. 욕실에도, 부엌에도 없었다. 그러다 거실에서 딸그락 하는 유리 잔 소리가 들렸다.
서연은 몸을 일으켰다. 스웨터 하나 걸친 채 복도를 걸었다. 문틈 사이로 스며드는 불빛은 너무 노골적으로 적색이어서, 마치 누군가 피를 흘리는 것처럼 보였다.
거실 소파에 민수가 앉아 있었다. 셔츠는 벗어던진 채, 가슴이 드러난 반팔 티 하나만 걸쳤다. 왼손에는 샴페인 글라스, 오른손에는 휴대폰이 들려 있었다. 화면은 꺼져 있지만 네온처럼 번쩍이는 잠금화면이 서연의 눈에 찍혔다.
"…민수야."
민수는 고개를 돌렸다. 눈동자가 유리처럼 투명했다. 그는 시선을 한참 맞추더니, 입을 열었다.
"나는 네가 존중받는다고 느껴야 한다고 생각해."
한 마디, 스물한 글자. 그것만으로 서연의 손끝이 굳었다. 무릎 뒤쪽이 뻣뻣해지며,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질 것처럼 무게중심이 흔들렸다.
1
존중이라는 단어는 침대 위에 올려진 새하얀 장갑 같았다. 보기엔 단정했지만, 그 안에 무엇을 숨기든 손끝 하나 드러나지 않는다.
민수는 ‘존중’의 첫 타깃으로 회사 회식을 골랐다. 서연이 직장 동기들과 두 번째 술자리를 마치고 들어온 날, 민수는 아무 말 없이 샤워실 문을 잠갔다. 물소리만 새벽 4시까지 이어졌다. 다음 날 아침, 그는 식탁 위에 쪽지를 남겼다.
유리가 보면 서운해할 거야. 너도 알잖아, 그애가 요즘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여기서 **‘유리’**는 민수의 옛 여자친구였다. 결혼식 며칠 전, 민수가 "그냥 친구"라며 연락처를 지웠던 사람. 그런데 어느 순간 그녀는 ‘우리 모임의 공적 자산’이 되어 있었다. 유리가 눈물 한 방울만 흘려도, 민수는 서연에게 배려를 요구했다.
"네가 있어야 우리 모임이 편해. 네가 없으면 유리가 나한테만 의지하게 되잖아."
그 말 한마디에 서연은 그날 회식석상에서 술을 한 모금도 입에 대지 못했다. 동기들이 "왜 오늘은 안 마시냐"고 물었을 때, 서연은 민수의 눈빛만 떠올렸다. 그 눈빛은 침대 위에 올라와 발끝으로 그녀의 가슴을 누르는 무게였다.
2
두 번째 ‘존중’은 침대 위 온도였다.
민수는 주말마다 새벽 골프를 갔다. 토요일 새벽 4시면 차 시동이 울렸다. 서연은 눈을 뜨지 않는 척 했다. 그가 나가고 나면 침대는 뜨거웠지만, 그 뜨거움은 민수의 체취가 아니라 죄책감의 온도였다.
퇴근길, 서연은 우연히 동호회 술자리 사진을 봤다. 민수는 유리 곁에 앉아 있었다. 유리는 민수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손에는 소주 잔. 민수는 유리의 머리카락을 살짝 쓰다듬고 있었다. 사진 속 시간은 새벽 2시 10분.
서연이 집에 돌아오자 민수는 이미 샤워를 끝낸 상태였다. 그는 말했다.
"오늘도 유리가 많이 울었어. 네가 없어서... 혼자 더 힘들어하더라."
새벽 2시 17분, 서연은 침대에 누워 민수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의 등에는 유리의 향수 냄새가 배어 있었다. 차가운 침대 시트가 서연의 엉덩이를 할퀴듯 달랬다.
3
세 번째 ‘존중’은 침묵의 무게였다.
결혼 1년, 서연은 더 이상 친구들과 단톡방에 잘 나가지 못했다. 민수는 그녀의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네가 나한테도 이렇게 말하면 존중하는 거지."
서연이 모르는 새, 민수는 그 단톡방을 나갔다. 친구들은 서연에게 물었다. "너희 남편이 왜 나갔어?" 서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민수는 그녀에게 물었다.
"왜 우리 사진들이 다 들어나 있어? 유리가 보면 서운해할 거야."
그날 이후, 서연은 사진을 숨겼다. 결혼식 사진, 신혼여행 사진, 일상 사진. 민수는 그녀에게 말했다.
"존중은 네가 먼저 시작하는 거야."
4
그러던 어느 새벽, 서연은 민수의 휴대폰을 열었다.
잠금화면은 0207이었다. 2월 7일, 유리의 생일. 서연은 떨리는 손으로 패턴을 풀었다. 카카오톡 최상단에는 **‘유리(옛날 친구)’**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
대화방을 열자, 마지막 메시지가 눈에 들어왔다.
유리: 오늘도 고마워, 민아. 네가 없었음 나 진작 이혼했을 거야. 민수: 괜찮아. 너만 편하면 돼. 어차피 서연이 이해해.
서연은 그날 밤 민수가 유리를 위해 노래방 비용까지 냈다는 것을 알았다. 유리가 민수의 집으로 찾아와 밤새 술을 마셨다는 것도. 그리고 민수가 유리를 위해 서연의 생일 파티를 취소했다는 것도.
5
서연은 민수의 뒷모습을 보았다.
새벽 2시 17분, 민수는 유리에게 다시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민수: 오늘도 서연이 예민하게 굴더라고. 너한테 미안하잖아.
서연은 조용히 침대에서 내려왔다. 발끝으로 걸어가, 민수의 뒤에 섰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민수의 휴대폰을 낚아채, 화면을 껐다.
민수는 뒤돌아 서서 서연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 사이의 공기는 얼음장이었다. 서연은 민수의 손에서 글라스를 빼앗아, 샴페인을 모두 싱크대로 쏟아버렸다.
거품이 내려앉는 동안, 서연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대로 침실로 돌아가 문을 잠갔다. 침대 위에는 민수의 체취가 남아 있었지만, 서연은 차가운 시트를 끌어올려 몸을 덮었다.
침묵 속에, 서연은 속삭였다.
"존중은 느끼는 게 아니라 받는 거야. 네가 먼저 배워야 할 거야."
그리고 그녀는 눈을 감았다. 새벽 2시 17분, 침대는 여전히 얼음장이었지만, 서연의 심장은 뜨거웠다.